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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오즈 Mar 16. 2022

비틀거리다

고등학교 10 | 원망과 후회가 가득했다 

    그날은 전교 학생회 임원에게 임명장을 주는 날로, 전교생이 강당에 모였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고, 3학년 1학기는 대입 수시 전형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다들 시험공부에 집중한 상황이었다. 


    나 또한 피곤해서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면서 수여식을 기다렸다. 무미건조하게 무대로 올라가 임명장을 받았고, 그날따라 뻐근한 다리를 이리저리 털어가며 교실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때 갑작스러운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시작되었다. 곧 끝날 거라 생각했다. 5분이나 지나서야 나는 교장의 말에 담긴 감정이 점차 고조되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나는 말의 요지가 '학생답지 않은 옷차림과 언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바로잡으라고 있는 사람이 선도부이며 이를 이끄는 사람이 선도부장, 바로 나라는 사고가 머릿속에서 도출되자 제대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여자는 조신하게 자라서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라는,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문장이 강당 가득 울려 퍼졌다. 교장의 분노는 끝도 없이 격화되었고, 그 절정에는 모두 무릎을 꿇어라고 했다.


    지금이라도 내가 무대에 올라가 혼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은 감정이 휘몰아치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린 채 풀썩 주저앉았다. 뻐근한 무릎 안의 신경이 발끝까지 이어졌다. 모두가 별 반항 없이 무릎을 꿇었다.




    교장은 씩씩대며 강당을 걸어 나갔고, 3년간 전교회장을 맡은 친구가 전교생을 각 교실로 돌려보낸 뒤 전교 임원을 시청각실에 불러 모았다. 강당에서 시청각실까지 고작 20미터도 되지 않은 복도를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나는 이미 동공도 풀린 상태였다.


    걷다 보니 손에 무언가 들려 있던 걸 느꼈다. 아까 교장에게서 받은 전교 임원 임명장이다. 두 손에 들고 종이에 적힌 글을 찬찬히 읽어보던 나는 이게 내 것이 맞는지, 지금까지의 내 노력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뭐 때문에 무릎까지 꿇어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임원 10명 정도가 시청각실에 들어섰고 두꺼운 철문이 닫히자마자 전교 회장은 들고 있던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구겨진 임명장이었다. 내 손에 들린 종이도 이미 무의식적으로 구겨진 상태였다. 


    우리는 모두 흥분한 채 말을 쏟아냈다. 학교 설립에 이바지했던 교장은 오랜 시간 이 학교를 떠나 있다가 정년퇴직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 이 학교로 다시 돌아왔다. 취임하시자마자 교장은 공부하는 데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성차별적 언행을 하며 학생들이 하는 모든 활동에 훼방을 여러 번 놓았다. 쌓여왔던 불만이 학교 밖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구겨진 임명장이 날아다녔고, 우리는 SNS에 해당 사항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부모회와 같이 연합해야 한다는 대화를 나눈 우리는 7교시 시작종에 맞추어 각자의 반으로 돌아갔다.


    이미 회복이 불가할 정도로 구겨진 임명장을 검지와 엄지로 겨우 집어 들고 비틀거리며 교실로 돌아왔다. 시험공부에 열중하는 주변 친구들이 힐끔대며 우리의 격앙된 표정을 쳐다봤다. 내 자리로 돌아와 풀썩 의자 위로 쓰러지듯이 앉아서 책상 위 수능특강을 펼쳤다. 시험이 머지않았기에 공부에 열중해야 했지만 도저히 눈의 초점이 잡히지 않았고 귀에는 격분한 교장과 전교 임원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교실에 앉아 있는 게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반장에게 화장실에 가겠다고 거짓말을 하고선 3학년 교무실 앞 소파에 걸터앉았다.


    화가 났다. 선도 활동을 더욱 충실히 할 수 있었으나 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동시에 교장의 어이없는 언행에 나는 왜 반박 한 마디를 못했을까. 원망과 후회가 몸 가득 매웠다.

 



    쌓여가던 자부심이 무너지는 소리가 머릿속을 메웠다. 무너져 내린 잔해 더미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후회뿐이라는 게 서글펐다. 꽤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착각이었다니.


    그리고 머지않아 불쌍했다. 모든 걸 잃고 스스로 손에서 놓아가면서 노력한 게 이런 거라면 더 이상 어느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 환경이 그대로 유지되면 다시 모든 걸 망쳐버릴 게 뻔했다.


    오랫동안 혼자 지내느라 누구한테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절대 학교에서는 울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 무기력한 나 자신이 용서가 되지 않자 순식간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무릎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소리 없이 울었다. 나의 개고생은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했다. 어떤 결말을 생각해도 전교생이 나 때문에 무릎을 꿇는 것보다 최악은 없었다.

    



    근데 그 일의 결말은 3학년 교무실 문이 열리면서 끝나지 않았다. 3학년 선생님들이 중얼중얼 대화하며 우르르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저녁 무렵이 된 복도는 어두웠고, 선생님들께서 형광등 스위치를 켜며 그 복도에 웅크려 있던 내가 그대로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던 한 선생님이 나를 발견하고 기겁하며 다가왔다. 분명 다른 사람의 눈에는 시체와 다름없는 모양새였으나 여전히 울고 있던 나는 설명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 선생님이 내 옆 소파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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