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09 | 자존심이 구겨진 자국으로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2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이제야 나는 무작정 전진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뒤따라오던 발자국의 기록을 유심히 보았다. 이미 퇴근하고 없는 선생님의 빈자리를 쳐다보다가 돌아온 기숙사 학습실. 책상 가득 학교생활기록부를 펼쳐두고선 체육학과의 차선책으로 지원할 학과를 결정해야 했다.
1학년 스포츠 덩어리 사이에 조금씩 끼어있는 모래알을 탈탈 털어 활동 키워드를 찾았다. 이를 2학년 활동과 엮어보며 가장 괜찮은 흐름을 이어나갔다. 소설도 플롯이 있기 마련이니까. 물론 1학년 때는 이런 글이 완성될지는 몰랐겠지만.
사회과학계열이 적합했다. 그나마 관심 있던 분야는 불평등 정도였다.
가장 관심 있던 플롯은 바로 전교 임원의 재임이었다. 작년에는 선도부 차장이었으니 올해 선도부장까지 노려보고자 했다. 1년간의 활동으로 개선되었으며 이후에 더 개선해야 할 부분이 명확하게 보였고, 임원으로서 크게 실수한 적도 없어서 임원 면접에서 제시될 질문 또한 무난했다.
작년과 달리 지원자 수가 적었던 탓에 면접 직후에 결과를 공지하던 한 선생님은 내게 '잘하면 안 될 뻔했어. 경쟁자들이 진짜 쟁쟁했거든.'이라고 하시면서 교무실로 돌아가셨다. '잘하면 제가 되겠지요. 저 처음 봤으면서, 흥칫뿡.'이라 (물론) 속으로 받아쳤다. 나는 큰 무리 없이 전교 임원 재임에 성공했다.
전교 1등, 수석, 만점과 같은 자극적일 정도로 충격적인 단어는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따금 좋은 성적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실수로 취급될 정도로 낮았던 시험 점수를 상쇄하는 것에 그쳤다.
외국어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내가 입학 초기에 할 수 있는 거라곤 수능 영어 단어 외우기와 일본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쓰는 법 정도밖에 없었다. 언어라는 특수한 목적을 가진 고등학교답게 언어를 사랑하는 친구들 앞에서 턱없이 부족한 언어 능력에 매번 주눅 들어 살아야 했다.
2년간 내 삶은 응원으로 가득했다. 매일 아침 전교생 중 가장 일찍 학습실로 내려와 공부를 시작할 때 사감 선생님께 한 번, 학생회 업무로 문의드리러 방문한 교무실에서 한 번, 밥을 늦게 먹으러 와서 죄송하다는 말에 영양사 선생님께 한 번.
나는 졸업할 때까지 매일 구겨진 자존심에 남은 자국을 보며 살았다. 그 자국이 한 획이 되어 한 폭의 그림이 그려졌고, 그걸 보는 사람들이 이 정도면 멋진 그림이라며 응원하기도 했지만 그건 역시 나에게 구겨진 자국에 불과했다.
성취가 부재한 성장을 매일 겪으면서도 나는 한 번도 멋들어진 성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내 능력을 탓하지 않았다. 내가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낼 때 그 친구들은 언어를 접했을 것이고, 그렇게 쌓인 노력의 시간들이 조금 다른 곳에 쌓여있었을 뿐이니까. 내가 쌓아온 것들은 대부분 '노력' 그 자체였다. 친화력마저도 내 노력의 결과였다. 그렇게 노력은 내 재능으로 자리 잡았다.
3학년 3월. 대입을 도와주실 담임 선생님이 신학기를 맞아 새로 배정되었다. 순탄할 줄만 알았던 고3은 예상보다 더 이른 시점에 곤란해졌다. 조금씩 잊고 있던 사실이 불쑥 고개를 들어 내 시야를 가려버렸다. 어둑하게 가려진 눈을 감고 잠시 혼란을 쫓아야 했다.
그건 내 노력 때문이었다. 교과활동과 비교과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학교 특성상 수시와 정시를 모두 완벽하게 챙기기에는 취침시간을 제외한 18시간만으로는 힘들었다. 그러나 1년간 하루를 20시간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진 나에게 수능을 준비할 시간이 비교적 많았다. 그 덕분에 지금껏 나는 모의고사 성적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기복이 없는 편이었다.
선생님께서는 2학년 11월 모의고사 성적표를 내게 들이대시면서 정시를 권했다. 2학년 11월 모의고사 성적은 단언컨대 운이었다. 그날따라 평소보다 신체 컨디션이 너무 좋았고, 시험에 좋아하는 문제 유형이 다수 출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을 믿고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의 운은 실력보다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나는 한 번도 정시 진학을 고려조차 못한 상태였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어느 선생님도 내게 정시 진학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2년간 받아오던 모의고사 성적이 너무 당연했고, 이 성적 통지표에 적힌 숫자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나 또한 한 번도 선생님께 여쭈어본 적도 없었다.
3학년이 되어서야 그 성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저 허탈했다. 2년간 우물 안에 빠진 개구리여서 매일 괜찮은 우물을 찾아 고생했는데, 이미 빠져있던 우물이 생각보다 괜찮은 우물이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그리고 나는 매우 무지했다. 수능에 대해 무관심했을뿐더러, 나는 무심결에 전 담임을 너무 신뢰하고 있었는 듯했다.
3학년의 삶이 시작되기 전, 3학년 담임선생님은 1학년, 2학년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25명 학생들에 대해 물었다고 했다. 정시 진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때, 두 분 다 정시 진학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 한두 명을 알려주었는데, 그중 내 이름이 언급되었다는 거다. 그걸 정작 나한테는 왜 안 알려주는지, 그 선생님들의 생각을 당최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쌓인 데이터로 인한 확고한 눈빛과 손가락으로 모의고사 점수표를 강조하는 선생님께 나는 '그럼 제가 1년간 한 그 고생은 무엇일까요'라는 표정을 진중하게 지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고등학교 3학년 부장 선생님의 경험치를 이겨낼 수 없었다. 내 황당한 표정을 온화한 미소로 가볍게 스쳐 보낸 선생님은 나를 정시에 열중하도록 설득했다.
1년간 수시 진학만 보고 질주했는데, 단 둘이 대화한 지 5분 만에 선생님께서는 내가 지금껏 달려온 방향이 잘못되었다며 정반대의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셨다. 뭐 이런 상황이 다 있을까.
이대로 넘어가면 분명 오늘 밤잠은 글렀다. 확실한 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선생님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던 나는 "혹시 내신이 낮아서 그런가요?"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본다. 표정을 보니 확실했다. 뭐 하나 뛰어난 게 없어 보이는 내 내신 성적표. 애매하게 수시에 매달릴 바에는 점수가 안정적인 수능에 1년을 모두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싶으셨던 거다.
나는 나에 대해 소개하겠다는 의미로 1년간 활동 기록을 담은 파일도 들고 왔다. 그 손이 무색해진다. 표정 변화가 없는 선생님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정시에 대해 무지했던 만큼, 내 수시 교내 활동도 그렇게 뛰어난 건 아니겠다, 싶었다.
- 누가 보면 혼낸 줄 알겠어. 나는 잘했다고 칭찬하는 거야.
내 반응에 칭찬이 무색해진다며 웃던 선생님의 목소리에 교무실 펜스 너머 한 선생님도 피식 웃으셨다.
- 쌤, 저는 진지하거든요.
옆 선생님의 웃음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껏 칭찬을 바랐는데, 이 상황은 상상도 못 했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3년의 성과가 정해지는 건 내게 너무 부담이었다. 게다가 지난 한 해를 살아온 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보통 이 정도의 모의고사 성적이 유지되면 정시를 선택한다고 한다. 근데, 나는 뭐 아는 게 없었으니 선택 자체를 고민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정시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선생님은 미소를 띠며 "그럼 네 생기부 한번 볼까?"라고 말하셨다. 그제야 나이스 사이트에서 내 학교생활기록부를 찾기 시작하신 선생님을 보며 나는 '정시 준비할 거라고 확신하셨구나' 싶었다. 그렇다. 완벽하게 낯선, 첫 대면이었다.
그 말을 주고받은 지 20분 넘게 지났다. 선생님 눈빛에 컴퓨터 모니터가 갈래갈래 찢어질 것 같았다. 뭔 질문이라도 하면 대화라도 할 텐데 선생님은 나에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고선 계속 학교생활기록부만 읽으셨다. 나는 담임 선생님이 국어 선생님이라 생활기록부에 미처 확인하지 못한 오탈자라도 발견하셨나 걱정했다. 같이 들고 온 내신 플래너를 펼쳐 오늘 공부할 과목 분량을 적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자 검은 교복 바지에 묻은 먼지도 털고, 선생님께 보여드릴 거라며 부랴부랴 써온 대입 자기소개서 초본도 다시 읽어보았다.
그래도 선생님의 시선은 여전했다. 이상하게 덜컹거리는 교무실 바닥 타일 시공 방식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때 선생님은 "으음"이라며 침묵을 깼다. 옆에 계시던 선생님은 '거기 아직도 상담하나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책상 펜스 너머 나를 미어캣 자세로 내려다봤다.
- 그래 하자. 그렇지만 공부 열심히 해야 해.
뭐를 하자는 건지, 공부는 수시인지, 정시인지 잘 모르겠으나 맥락상 수시 지원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 었던 나는 "지금 해왔던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께서 어느 부분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작년의 고생이 헛수고는 아니었다는 게 무작정 좋았다. 자습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 나는 그 고생이 사실 헛수고일 가능성에 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