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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오즈 Mar 09. 2022

성장은 노력 99퍼센트와 운 1퍼센트

고등학교 08 | 364일의 노력은 선생님 반 배정 하루에 결정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확실하게 깨달은 점이 있다. 그 노력도 어느 정도의 '운'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리고 특목고라고 해서 모든 선생님이 열정적이지는 않다는 것도 덧붙인다.




    25명으로 구성된 우리 반은 일본어를 배운다는 공통점 하나로 입학부터 졸업까지 함께 했다. 25명이서 3년간 같은 반으로 살아야 했고 단 한 명의 전학생도 없이 우리는 25명 그대로 졸업까지 해냈다.


    모든 고등학생이 고등학교 졸업에 큰 감명을 느끼곤 하지만 적어도 우리 25명은 졸업에 대해 조금 다른 의미로 감격스러워했다. 관심의 불모지에서 3년간 무사히 전원 생존하여 탈출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자신이 이번에 처음으로 이 학교에 발령받았으며 담임을 맡은 것도 처음이라고 소개했다. 서로가 어색했던 나머지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다. 낯선 환경 속에 어떤 것을 물어봐도 "몰라, 선생님도 잘 몰라요"라는 대답이 자주 돌아왔다. 진로 상담 시간도 매우 짧았다. 전체 내신 성적만 훑어보시고, 성적이 비교적 낮은 과목에 대해 더 열중해야 한다는 조언뿐이었다. 특히 그해 겨울, 선생님은 결혼하셨다. 결혼 준비로 바쁘신 선생님 대신 우리가 우리의 학교생활기록부를 직접 손수 작성해서 제출해야 했다. 선생님의 첨삭이 이루어졌지만 개요는 학생이 작성한 내용 그대로였다. 처음 학교생활기록부를 접한 우리는 비참한 작문 실력이 문서에 그대로 나타난 걸 확인하고선 절망했다. 애초에 학생이 학교생활기록부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에 '이 정도면 대학 수시 지원 못하는 거 아냐?' 하며 고등학교 입학 이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좌절했다.


    같은 시기 옆 반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담임 선생님이 진로를 담당하셨던 반은 시간이 될 때마다 수시 지원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반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 옆 반 친구에게 그 교육 내용을 대강이라도 알려달라고 하거나, 기웃대며 칠판 필기 내용을 엿보는 것에 불과했다. 

    수시로 대학 진학하겠다고 일찍이 결정한 친구들은 다른 반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자신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내용을 한 번만 검토해달라고 매달렸다. 나 또한 그중 한 명이었으며, 열 번 정도 거절을 당한 우리는 거의 자포자기인 상태로 2학년이 되었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은. 음. 설명을 하지 못할 정도로 뵌 적이 거의 없다. 물론 2학년 교과목을 담당하셨지만, 한 학기 당 한 번 정도, 길어도 상담 15분이 1년 간의 대화 시간의 전부였다. 내가 1년간 슬리퍼가 뜯어질 때까지 뛰어다닐 때 선생님은 내가 학생회 임원인 사실조차 몰랐다. 교무실 옆자리 선생님은 다 아실 정도였음에도.


    그리고 우리는 성장했다. '꼴찌는 일본어과'라는 공식이 조금씩 굳어져갈 때 우리는 공부를 하며 '꼴찌의 반란을 일으켜보자'라는 등 이를 꽉 물고 공부했다. 다들 흘려듣는 진로 강의가 진행될 때마다 맨 앞자리에 앉아 노트 빼곡히 필기하며 학교생활기록부 작성 방법을 혼자서 터득했다. 각자도생의 연속이었다.




    2학년 겨울. 학교생활기록부 정리가 마무리되어갈 때 즈음, 그 당시 학생회 활동을 하며 친해진 우리 반 반장이 터덜터덜 반에 들어왔다. 그리고선 친구들에게 다가와 말을 꺼냈다.


    - 담임 선생님이 나보고 김 00이라고 하더라?


    그 친구의 성은 '최'였다. 게다가 친구는 가나다순으로 구성된 번호 맨 마지막 학생이자 '반장'이었다. 25번 학생의 성이 '김'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여러모로 기적적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반장을 매일 아침, 점심마다 교무실로 불러서 일을 시켰으면서 여태껏 반장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담임이라니. 

    하루 종일 공부하랴, 학교생활기록부 쓰랴 지쳐있던 우리의 손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사소한 것을 부탁할 때도 적어도 두 번 더 말씀드려야 했지만 우리는 그래도 '설마 담임 선생님인데, 수시에서 가장 중요한 2학년 담임 선생님인데 그렇게 무책임하겠어?'라고 생각했다. '가장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학생의 이름도 잘 모른다', 라. 선생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졌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학교생활기록부를 서로 첨삭해주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자고 다독이며 무사히 2년을 보냈다.




    3학년이 되기 일주일 전. 3학년 담임 선생님 명단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이번에 배정된 담임 선생님은 지금껏 우리 학년을 담당하신 적이 없는 분이라 그저 이름만 아는 상태였다. 우리는 또다시 낯선 선생님을 담임 선생님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에 무덤덤해져 있었다. '이번에는 성 말고 이름도 못 외우는 거 아냐?' 하면서 말이다.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후배 2명과 아침 선도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여러 번 켜던 후배 한 명이 지루함을 깨기 위해서 내게 새로 배정된 담임 선생님의 성함을 물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직후의 상황이 뇌리에 박혔다. 선생님 성함을 들은 후배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졸린 눈을 번쩍 뜨더니 옆에 있는 친구와 속사포 랩을 하듯 미친 듯이 말을 뽑아냈다. 작년 본인의 학년 교과 담당 선생님인데 그런 선생님은 처음 봤다며, 나보고 부럽다고 했다.


    부러워? 내가? 우리 반이?


    아침 선도 활동이 끝나고 돌아와 반 친구들에게 그 후배의 말을 그대로 전했을 때, 내 앞의 친구들의 반응도 같았다. "우리 일본어과인데, 그런 선생님이 우리 담임이라고?" 하며 우리는 그럴 리가 없다며, 우리는 버려진 반이라며 손사래까지 쳤다.


    며칠 뒤 학기 첫날 조례시간에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선생님을 마주하고 나서야 우리는 긴장 2년 치를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기억하기로는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개인 상담이 진행되었는데, 그 당시 많은 친구들이 이전 학년에 분명 끝냈어야 할 것들을 30분 넘게 질문하며 홀가분함, 그 이상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렇게 우리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선생님을 담임 선생님으로 맞이했다.

    입학한 이래 처음 받는 대접에 우리는 선생님이 우리 반 친구들과 대화를 끝내고 교실 문을 열고 나가실 때마다 조용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랑받는 기분. '청소년이라서'가 아니다. 사실 이건 모두가 느낄 수 있다. 누군가가 든든하게 주변에서 사랑을 전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힘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2학년 당시까지 우리 반은 대부분의 과목에서 꼴찌 반을 맡았다.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시험을 잘 쳐도, 못 쳐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담임의 무관심이었다.


    담임 선생님 외 사람들로부터는 다른 반응이 있었다. 잘 치면 '엥, 너네 반이?'라는 반응이, 못 치면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이 2년 간 이어졌다.


    우리는 이런 반응이라도 괜찮으니 담임으로부터 조금의 관심이라도 받고 싶었다. 

    우리가 너무 거창한 걸 바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오히려 거창한 걸 부탁한 사람이 되었다. 무관심과 방관이 연속된 채로 우리는 반 공동체로서의 존재감을 잃었다. 존중을 많이 받지 못해 누군가를 존중하기도 어려웠다. 무언가가 주어지면 혼자서라도 악착같이 얻어 살아남으려고 했다. 그래도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이걸 읽어보는 사람들 중 일부는 '그거 너네들이 그냥 '우리는 운이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대충 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물증이 있다.


    3학년이 된 우리가 수업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담임선생님을 뵌 이후 반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학기 초부터 한 명씩 5열 종대로 교실 구조를 완전히 바꿔 미친 듯이 앞만 보고 공부에 매달렸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반에서 해당 과목을 가장 잘하는 친구들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갔고, 그 친구는 당연하게 그 질문에 대해 알려줬다. 대학 수시 내신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시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닌 25명 모두의 성장을 기원했다. 그리고 처음 접하는 선생님의 관심에 감사함을 표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최선을 다했던 것도 있었다.


    당황스럽지만 당연한 결과가 머지않아 나왔다. 한두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전체 반 1등을 차지했던 것이다. 나머지 한두 과목도 2등이었다. 처음 중간고사 점수가 집계된 다음에는 '운이겠지' 싶었다.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25명 친구들도 그랬다. 처음 접하는 등수를 칠판 한편에 적어 내려갈 때마다 짧은 환호성을 지르던 우리 반은 매 과목에서 1등을 거듭하여 달성하자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기말고사에서 전체 과목 1등, 심지어 어느 과목에서는 2등과 평균 10점 이상의 차이로 1등을 차지하자 선생님들은 교무실이 떠들썩하게 이 결과의 원인에 대해 논의하셨다고 했다. 항상 주변에서 흐뭇하게 바라봐주신 선생님과 함께, 우리는 모두 웃으며 마지막 정기고사를 마무리했다.




       우리는 우리와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하는 담임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청소년 25명의 막연한 추측으로 이루어진 우리에서 2년 만에 벗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현실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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