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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오즈 Mar 29. 2022

떠나보낸다는 게 이렇게 울 정도로 슬픈 일이었나

대학교 04 | 자전거

    "뭐하고 싶은 거 없어?"


    2015년 겨울, 외고에 합격했다. 부모님께는 그게 당연하신 듯했다. 3학년 영어 성적이 낮다는 사실을 모르셨고, 면접 후기를 궁금해하실 때마다 나는 줄곧 "그럭저럭이었어. 근데 울지 않았어."라고 대답했기에.


    엄마는 그렇게 내가 외고에 합격하고 나서 겨울방학 동안 하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으셨고, 나는 한동안 고민했다. 중학교 3학년 나는 지금과는 달리, 하고 싶은 것이 넘쳤다. 대한민국 한 바퀴 여행은 물론 걸어서 전 세계 정도도 꿈꿀 나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음, 나는 자전거!"


    


 

   두 살 터울의 자매. 둘째이자 막내는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언니보다 작았다. 그리고 부모님은 항상 언니의 성장에 따라 자전거를 교체했다. 아이는 둘, 자전거는 하나. 그러나 다행히 언니는 운동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 프레임 가득히 언니의 이름이 적힌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단지를 트랙 삼아 돌아다녔다. 모래로 가득했던 놀이터에 우레탄 블록이 깔리고부터는 놀이터가 나의 운동장이었다. 하교한 후 영어학원에 가기까지의 틈을 놓치지 않고 매일 놀이터로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빛바랜 주황색 자전거는 그렇게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매일 나와 함께했다.

 

    그러나 이제 그 자전거도 작아졌다. 아니지, 자전거는 그대로였지만 내가 많이 자랐다. 언니보다 조금 더 커졌다. 당시 육상을 하던 나에게 속도는 가장 중요했고, 걸핏하면 체인이 경로를 이탈해버리는 자전거는 이제 속도를 즐길 수 없을 정도로 고물이 되었다.


    이렇게나 내가 자전거를 좋아하던 탓에 누군가가 나에게 꿈을 물을 때마다 나는 바로 <자전거 국토 종주>라고 대답하곤 했다. 특히 제주 둘레길을 자전거로 다니며 좋아하는 바람을 마음껏 맞이하는 것. 그리고 <서울권 대학에 진학하여 자전거로 등하교하기> 또한 내 꿈이었다. 그만큼 자전거는 내게 행복 그 자체였다.


    중학교 졸업을 두 달 앞두고 아버지와 함께 방문한 자전거 대리점. 문을 열자마자 나는 자전거 한 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인이 일주일 타다가 중고로 내놓았다며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던 대리점 주인은 내게 그 자전거를 살포시 제안했고, 나는 그동안 모아둔 90만 원 중 만 원도 빼지 않고 모두 그 자전거를 사는 데에 부어 넣었다.


    일명 <로드바이크>. 당시 자전거 타는 웹툰이 성황리에 전개되고 있었고 그 열풍으로 학생들의 등하굣길을 로드바이크와 픽시가 가득 메웠다.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되게 편해 보였는데, 막상 타보니 거의 핸들을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자전거 바퀴가 무려 28인치. 무게 중심이 높아지니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무려 한 시간 동안 비틀거리고 나서야 겨우 자전거 작동법을 배웠다. 기어 변속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니 페달을 조금만 밟아도 내 품속으로 바람이 가득 들어왔다. 재미있어 보인다며, 일평생 산악자전거만 타셨던 아버지가 로드바이크 위에 올라타셨고 여실히 비틀거리는 자전거를 보며 나는 깔깔 웃었다.




    그날 돌아오자마자 자전거는 베란다 창고 앞에 주차해두었고, 아버지가 두어 번 끌고 나가셨던 것을 빼면 그 자전거는 일평생 그 자리를 지켰다. 토요일 오후 퇴사에 일요일 저녁 입사가 반복되는 삶 속에서 자전거는 내게 사치였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올 때 자전거 핸들을 한번 꽉 잡아보고, 추운 바람이 불어올 때면 자전거 안장 위에 앉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졸업만을 기다렸다.


    2022년. 자전거는 그 자리를 7년간 떠나지 못했다.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 의사 선생님은 이 둘을 가장 피해야 한다고 하셨다. MRI까지 촬영하면서까지 받았던 정밀검사에서도, 서울에 유명한 정형외과 전문의도 각기 다른 진단명을 내놓았지만 하나같이 입을 모아 "절대 운동을 해서는 안됩니다"며 나를 주눅 들게 했다.


    펜데믹으로 인하여 서울이 아닌 울산에 있었을 때도 도저히 그 자전거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아우성치는 듯했다. 이 먼지 구덩이 사이에서 자신을 꺼내서 너같이 불행한 사람 말고 국토 종주할 수 있는 사람에게 보내달라고. 먼지 따위 앉을 여력도 주지 않고 자신을 막 굴릴 수 있는 사람에게 보내달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결국 3년이 넘도록 그러지 못했다. 간헐적으로 부모님께서 주시던 용돈을 다 모아 산 자전거. '언젠가 기적처럼 무릎이 괜찮아지면 꼭 저 자전거에 올라타야지. 그럼 행복하겠지'라며 불행의 매 순간을 받아들였다.





    대학교 4학년이 된 시점에서 내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이제는 보내주어야 했다. 자전거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을 거라며, 이제 나는 무릎 아픈 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략 7년 만에 그 자전거는 창고 앞을 떠났다.


    내가 중학생 때까지 페달을 굴리던 그 놀이터 한편에 자전거를 거치했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자전거 위 먼지를 털어냈다. 먼지구덩이 속 자전거 모습을 그대로 찍어 중고시장에 올리면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질 게 분명했을 정도로 7년간 움직이지 않았던 자전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잠시 끼익 거리던 바퀴는 고작 5미터를 굴리자 부드럽게 돌아갔다. 그렇지, 너도 움직이기 전에 기지개를 켜야지.


    페달, 안장, 프레임, 핸들까지 세심히 닦아내니 예전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참 예쁘다. 검은색 본체에 노란 선. 내가 이 모습을 보고 바로 이 녀석으로 결정했다. 맞다. 그랬다.


    자전거 위 물기가 햇빛과 맞닿아 반짝거렸다. 물기가 다 마를 때까지 언제 생긴지도 모를 놀이터 벤치에 걸터앉았다. 거의 다 마를 때 즈음 자전거에 올라탔다. 기어 변속, 브레이크가 모두 제대로 작동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거의 7년 만의 운행이었다. 균형 잡는 법을 잊은 탓에 조금 비틀거리던 자전거는 예전처럼 빠르게 급정거하고 변속하였다. 다행이다.


    자전거를 거치대에 세워두고선 이곳저곳을 찍었다. 프레임, 브레이크, 변속기, 안장, 핸들이 담긴 사진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중고거래 사이트에 접속했다. 구매는 2015년 겨울. 그리고 판매는 2022년 봄. 그 사이에 자전거를 탄 횟수는 고작 4번. 90만 원이었던 가격은 어느새 40만 원이 되어 있었고, 나는 그렇게 18만 원에 그 자전거를 판매한다는 글을 올렸다. 화면 가득 자전거 사진이 들어섰다.


    물씬 우울해졌다.


    



    빨리 놓아주어야 했다. 내가 한참 무릎을 부여잡고 무너져 있을 때 떠나보내야 했다.


    기적처럼 무릎이 말끔히 나아서 다시 자전거를 두려움 없이 탈 수 있는 그런 순간. 그 순간만을 4년 동안 애타게 기다렸다. 그 생각이 그토록 간절했던 이유는 무릎이 예전보다 나빠지는 게 매 순간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아질 확률이 낮아지면 포기해야 했다. 다른 건 다 포기할 줄 알면서 과거의 행복은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행복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으면 나는 그것을 빨리 놓아주고 최대한 빨리 잊어야 했다. 과거를 붙들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불행한 나에게 새로운 행복의 길을 찾아 품에 쥐어주어야 했다. 지금 상태로는 행복한 과거와 행복한 미래를 둘 다 간직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러니 내일을 살기 위해서는 과거의 행복을 잊는 게 더 맞았다. 나는 과연, 욕심만 가득했다.


    내게 기적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것이 내가 애착을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자전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점점 그 애착의 순간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페달을 박차며 신나게 질주하던 사람을 봐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노란 선 자전거의 존재를 기억 속에서 찾기를 바란다. 이것이 이루어질 확률이 비교적 높으니 나는 앞으로 이 새로운 꿈에 몰두하겠다.


    게시물을 올린 다음, 대학교 실시간 강의를 들었다. 교수님께서 쉬는 시간 없이 강의를 이어나가셨고, 나도 쉬지 않고 계속 울었다. 공부에 지친 탓이었는지, 행복을 잃어가는 듯한 감정에 서글펐던 탓인지.


    사람도 아닌 녀석 하나를 떠나보낸다는 게 이렇게 울 정도로 슬픈 일이었나.


    

    

    게시물을 올린 그날 밤, 자전거는 중학교 3학년 아이와 함께 떠났다. 사진과 그대로라며, 진짜 새 거처럼 잘 움직인다는 평가와 함께 아파트 단지 도로에서 자전거를 가볍게 몰아보던 아이는 굉장히 만족한 듯했다. 현금을 건네고선 집으로 돌아가려는 새 주인에게 나는 "안전하고 행복하게 타세요"라는 말을 건넸고, 그는 "감사합니다"는 말과 함께 자전거와 유유히 아파트 단지를 떠났다.

    이제 텅 비어버린 창고 앞을 보면 많이 슬플 것만 같았는데, 새 주인이 중학교 3학년 학생이라 오히려 기뻤다. 다행이다. 계속 다행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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