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 거리던 눈빛은 기세를 바꾸어 내게 거센 비난을 쏟아냈다. 내 앞에는 고등학교 후배 두 명이 앉아 있었고, 나는 들고 있던 에이드 컵을 내려놓기도 전에 후배들의 따발총을 그대로 맞아야 했다.
나는 그저, "나 서울에서 살기 싫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누구는 가고 싶은 곳에 있으면서 참 배부르다, 그렇지?
그렇다. 나는 서울권 대학에 막 진학한 1학년. 그 앞에 앉은 두 후배는 각각 고등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며 만난 자리에서 내가 꺼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해버린 거다.
그런데 조금 솔직해지자면 나는 그 자리에서 꼭 필요한 이야기를 했다고 믿는다. 줄곧 울산에서만 살아온 그 친구들은 꼭 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으면 했다. 서울은 우리를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때는 여름방학이었다. 고작 한 학기를 보낸 나는 꾹 참아왔던 말을 풀어냈다.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 앞에서 "서울은 생각보다 별로야. 안 그래?"라고 했다가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아이구, 서울의 낭만을 아직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 낭만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친구들이 하나 둘 서울에서의 거주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방학이 되면 재빠르게 고향으로 떠났고 서울은 더 외로워졌다.
그래서 너는 왜 서울이 싫은데?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하면 서울권 대학을 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물론, 특정 학과나 국립대의 경우는 열외다.) 나의 경우는 부모님의 의견이 컸다. 대학은 무조건 서울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해서 최대한 좋은 대학을 가라고 하셨다.
그때까지 내게 서울은 서울대공원과 국립박물관이 전부였다. 어린 나는 누구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눈앞은 항상 반짝거렸고 화려했다. 맛있는 것을 먹었고 깔끔한 곳에서 잠에 들었다.
대학에 입학한 일주일 만에 그 이면을 알았다. 그 화려함은 내가 곤히 잠드는 것을 방해할 만큼 정신없었고, 맛있는 것은 비싸고 자극적이라 직접 밥을 만들어 먹어야 했으며, 깔끔한 곳은. 깔끔한... 곳은 집이 아니라 호텔이다!
서울의 화려함이라는 가면이 벗겨진 건 처음 자취방으로 향하는 길중이었다. 예상보다 굉장히 빨랐다. 지하철에는 탑승 인원이 과연 정해져는 있는가 싶었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과연 탑승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나는 3번의 차량을 보내고 나서야 저 사람들과 나의 운명이 같다고 확신했다.
겨우 탈출한 곳은 한성대입구역이었다. (사람에게 튕겨져 나왔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다가 잘못된 곳으로 나온 나는 그렇게 지도 앱에 의존해서 겨우 집 골목을 찾았다. 대로변에는 처음 보는 브랜드지만 3층 건물인 것을 보아 굉장히 유명할 것 같은 빵집과, 매일 커피 향기로다가 나를 유혹할 만큼 커다란 세이렌이 그려진 커피숍이 있었다. "그래, 이게 서울이지. 지하철은 하루에 아주 잠깐 참으면 되지" 생각했다.
그러나 서울의 이면은 멀지 않았다. 골목으로 다섯 걸음 걸어가자 내게는 기가 막히는 풍경이 펼쳐졌다. 소형차 한 대 정도만 질주할 수 있을 법한 골목이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도로명 주소의 건물 번호를 어떻게 부여했나 싶을 정도였다. 좌우 앞뒤 구분 없는 건물 중 하나가 내가 앞으로 머물 집이었다.
엘리베이터는 무슨, 하늘도 한 뼘 정도 겨우 보이는 곳. 그 집이 내 첫 자취방이었다. 이미 짐을 풀고 있었던 언니는 내게 "여기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본 집 중에 최고야"라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숙사, 셰어하우스를 떠돌다가 내가 서울권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처음으로 자취방을 맞이한 언니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한성대입구역 근방에 있는 방. 침대 하나 둘 곳 없는 방에 맞지 않은 신형 냉장고에 옆 기와집. 이것들이 내가 1년이 채 되지 않아 이사를 하게 된 이유다.
한성대입구역은 언니의 대학교와 매우 가까웠으나 나의 경우는 정 반대였다. 집과 학교를 오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할 정도로 먼 곳을, 약한 내 몸이 이겨내지 못했다. 왕복 두 시간 반. 그중에 장염과 위경련이 일어나는 건 사실 내게 흔했다. 피곤한 몸에 적절한 영양이 공급되지 못한 몸, 게다가 우울증까지!
학교와 집을 오가는 길. 1년 통학 생활 중 대략 스무 번 정도 명동역에 내렸다. 내 나름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명동역은 평균적으로 사람들의 통행이 잦으면서도 몇 정거장 끝에 한성대입구 역이 있었다. 잘하면 빈자리에 앉아가기도 했다.
새내기의 로망, 크로스백은 무슨 얼어 죽을. 매일 같은 백팩을 메고 다녔던 나는 그렇게 새하얘진 얼굴로 명동역 스크린도어 근처 의자에 앉아 그 백팩을 품에 끌어안고 숨을 골랐다. 약을 먹고 진정이 되기까지 대략 20분, 그리고 그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침대 하나 둘 방이 없었다는 것은 공부하고 잠드는 공간에 거대한 냉장고도 있었다는 뜻이다. 거대한 신형 냉장고는 당연히 그 크기에 부합하는 냉각기가 있었고, 그 냉각기의 모터가 내 머리 바로 옆에서 하루 종일 울어댔다.
그리고 기와집을 주의하라. 이사할 때 제발 주의하라. 특히 자신이 벌레를 못 잡는 여린 심장을 가지고 있다면.
바퀴벌레가 기와를 좋아한다. 그리고 바퀴벌레가 방역차량의 소독약을 피해 날아온 것이 바로 옆 건물, 우리 집이었다. 매일 쓸고 닦으면 뭐할까. 현관문을 열면 그대로 바퀴벌레가 들어왔고 다섯 마리 정도를 연달아 처리한 후 돌아본 집에는 이미 여린 심장을 가진 언니가 그 집을 당장이라도 떠날 태세를 하고 있었다. 언니가 바퀴벌레를 본 후 잠든 나를 깨우는 것만큼 심장 벌렁거리는 일이 없었던 나는 언니를 따라 집을 떠났다.
두 번째 집은 그렇게 부모님께 부담을 지더라도 신축을 구하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무려 8차선 사거리 바로 앞에 위치한 집이었고, 이사한 첫날밤부터 서울이 과연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새벽까지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도로 철판 덜컹거리는 소리, 옆 식당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환청과 맞먹을 때쯤 언니와 나는 또 집을 떠나야 했다.
그렇게 마주한 진정한 혼자만의 자취. 학교 후문에 혼자라면 넉넉하게 쓸 만한 집이었다. 물론 샤워기 바로 아래 콘센트가 있고, 하수 시설이 엉망이라 악취가 계속 올라오면서 설거지를 하려면 신발을 신어야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조용했고 주변에 기와집도 없고 냉장고는 있지만 크기가 작아 냉각기 소리도 매우 작았다.
그래서, 자취방이 별로라 서울이 싫다는 것?
이번에 이사한 집이 꽤 마음에 든다. 책장 두 개를 놓을 공간도 있고, 주변에 상권도 괜찮아서 맛있는 음식을 해 먹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고향, 울산을 그리워했다.
나는 태어나고 지금까지 울산에서는 줄곧 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내가 태어나고 정착한 이 아파트에서 부모님도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하셨다. 초등학교까지 걸어서 30초, 놀이터까지는 걸어서 10초인 이 집이 꽤 마음에 들었다고 하셨다.
내가 다행히 건강하게 자라나 부모님의 곁이 아닌 혼자 잘 나이가 되었다. 방은 안방까지 3개. 한 방은 컸고, 다른 한 방은 조금 좁았다.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큰 방에 버티고 섰다. 언니는 완고한 내 얼굴을 보더니 이미 미래를 체감한 듯이 엉엉 울면서 좁은 방으로 향했다. 그때는 지금까지 여기가 내 방이 될 줄 알았을까. 정확한 건 넓은 방 벽지 색이 핑크 색이라 그저 좋아했던 그 아이는 너비 따위는 신경을 안 썼을 거라는 점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바뀐 건 가구와 나의 외형뿐이었다. 유치원생일 때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이 방에서 자랐다. 그동안 아파트 상가에 입주한 태권도 관장이 바뀌고, 미술학원이 음악학원으로, 빵집이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로 바뀌는 것을 나는 항상 이 창문으로 내려다보았다.
- 여기는 계속 있을 거야.
이제 이 집에 이사 온 지 23년. 엄마는 취직에 초조해하는 내게 말했다. 너는 지금 떠나 있지만 우리가 머무를 공간은 항상 있을 거라며,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축 쳐진 내 등을 토닥였다.
서울은 나를 위태롭게 해. 어쩌면 죽음까지.
서울. 너무 많은 사람들과 높아져만 가는 건물. 그러나 여기 어디에도 내가 두발로 딛고 설 공간조차 없다. 언젠가 학교 학회에서 청년의 주거권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때, 다른 주제에 비해 침묵하던 시간이 많았던 기억이 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누군가가 나를 깔아뭉개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탄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나 같은 서울 초짜를 딛고 서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헌법 제36조 3항과 주거 기본법 제2조에는 국민들이 쾌적한 주거생활과 안정적인 주거환경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를 국가가 보장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선 우리는 묻는다. 어떤 곳이 '쾌적하며 안정적이고 인간다운 주거공간'인지를 말이다. 보통 그러면 흔한 답변이 흘러나온다.
- 부엌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전기도 있고 보일러도 되고 물도 나오는데, 뭐 이 정도면 인간적이고 쾌적한 공간이지, 안 그래?
그렇다, 최소한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네 곳에는 말이다. 그럼에도.
서울은 사람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1학년 재학 당시 내가 당시 살던 집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할 때에는 그저 내가 지금까지 너무 귀하게 자라왔다고만 생각했다. 분명 다리를 피고 누울 수 있으며 따뜻한 물도 나오고 인덕션도 있었음에도 나는 그곳이 너무나 싫었다. 매일 닦고 쓸어도 애착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게 다 그 최소한의 권리 때문이었다. 다리를 피고 잘 수는 있었으나 몸을 굴려가며 잘 수는 없을 정도로 좁았고, 그 좁은 공간에서 나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이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새로 이사했으나 그 집은 새벽까지 빠르게 환자를 이송해주시는 구급차 소리와 윗집의 싸우는 소리, 옆집의 대화 소리에 귀마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인간다운 삶. 대학교 입학 당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원망에 가득한 채 서울에 도착했고, 그 기억은 1년 뒤 심각한 우울증으로 변질되어 내 공간을 지배했다. 누군가는 '이 정도면 인간다운 공간이지'라고 말하는 공간에서 한 발짝도 뗄 수 없었을 정도로 나는 인간답지 않은 일상을 이어갔다. 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사할 때마다 열 곳이 넘는 곳을 둘러보고 나면, 공간이 어그러지는 정도는 무한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가끔 기괴하기까지 해서 헛웃음만 나온다. 저번에는 녹슬고 뒤틀려진 대문에 갇혀 4명이서 겨우 탈출했던 적도 있었다. 산 중턱에 있었던 이 집은 월세에, 보증금만 2억이었다. 계단은 밟자마자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져 낙사할 뻔했다. 이번 집은 현관에 싱크대가 있다. 그게 요즘 자취방 트렌드라며, 공인중개사 분은 놀란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더 안타까운 건 매번 결정한 모든 공간이 그 주변 매물 중 가장 괜찮은 편이라는 점이다.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우리는 거주지를 구하면서 이유 모를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 올라온 게 가장 주요한 자책 사유였다. 마음을 내어줄 때 즈음만 되면 항상 그 자취방을 떠나야 했다. 서울의 온갖 자치구를 돌아다닌 나는 울산이 아닌 모든 곳에서는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최소한의 기준만 충족된 공간으로 이사하는 날이면 매번 나는 '그래 이곳만 한 방은 없어.'라고 다독였고 이번에는 '설거지는 신발 신고 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덧붙였다. 그게 내게 남은 최선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나의 행복을 빌어주기는 힘들었다. 이미 그러기엔 이리저리 치이느라 나는 지쳐버렸다. 행복을 잊고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날이 이어졌다.
쾌적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안정적인 삶을 이어나가며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한 곳에서 계절이 변하는 것도 보고, 사람과 대화도 하면서 꿈을 향해서 나아가고만 싶다. 그렇게 저렴하지 않은 가격을 주면서까지 내가 행복하는 걸 바라는 것은 과연 욕심인가! 지금 서울에서는 직립보행 동물이 두 발 딛고 서있는 것조차 불안한 게 과연 안정적이며 인간다운 일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서울 곳곳에는 아직도 화려한 아파트를 짓고, 세계적으로 유망한 건축가가 건물을 짓는다. 그러나 정작 서울은 경제적 기반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이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게 나의 사설이다. 그게 내가 항상 사람들이 겹겹이 쌓인 지하철과 신축 건물로 가득한 서울이 아닌 25년 된 아파트가 있는 울산을, 새롭고 화려한 것보다 익숙하고 낡은 것을 그리워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