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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오즈 Mar 16. 2022

반항하지 않는 아이

대학교 02 | 사춘기

   - 엄마 나는 어떤 아이였어?


    횡단보도에 엄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를 바라본다. 운전석에 앉은 엄마는 옛 일을 떠올리는 듯하다. 아주 짧은 시간만이 흘렀다. 답변은 더 짧았다.


    -착했




    보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로 어렸을 적 기억이 있다. 내 시야에는 항상 엄마가 있었다. 보행기 아래에서는 언니가 블록 장난감을 만지며 놀고 있고 나는 그냥 엄마만 바라본다. 그게 전부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잠투정을 부리거나 뭐를 사달라고 백화점 한복판에서 우는 일도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 그런 아이가 있을 수 있냐는 말에, 엄마는 그저 "그러게, 너 같은 애가 있긴 하더라."라고 답했다.


    사실 그 이유를 나는 잘 안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함께 있지 않았다. 둘째인 나를 낳은 엄마는 몇 년 후 새로운 직장을 찾아 사회에 복귀하셨다. 내가 대략 만 2살이 되던 해였다.   


    아버지는 교대근무로, 어머니는 경력 개발을 위해 집을 비웠다. 그렇게 울지 않던 아이는 엄마를 찾으며 울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떠나가는 기분을 그때부터 느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울었는지,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던 언니의 교실에 내 자리가 있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부모님도 아닌 사람이 부모 행세를 하며 나를 다루는 게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곁에 남은 유일한 가족인 언니를 붙잡은 거다. 물론 그 당시 선생님과 언니에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죄송하고 고맙습니다)


    내가 6살이 되던 즈음부터 엄마가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나는 아프기 시작했고 병원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7살 때는 1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심한 폐렴을 이겨내야 했다.  머리에는 없던 기억이라 최근에서야 알았는데, 그건 내가 지쳐 잠들거나 기절할 정도로 수많은 고비가 있었기 때문일 거라며 애써 마음을 쓸어내리던 엄마였다. 게다가 다 나을 즈음 하면 재발하면서 그렇게 3인실 병실에서 7살을 보내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울지 않는 아이로 돌아왔다. 부모님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아이가 된 것보다 '하루 종일 울어재끼면 나만 피곤하다'라는 현실적인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울지 않는 내가 집을 떠난 시간이 늘어나자 그제야 부모님은 다시 직장으로 떠나셨다. 그동안에도 나는 자주 아팠기에 부모님 없이 혼자 병원 가는 법, 제조약 받는 법 등을 터득해야 했다. 부모님은 "이제는 초등학생이잖아, 맞지?"라며 내게 병원비를 쥐어주시곤 했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새벽 5시에 기상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엄마가 분리수거장에서 가져온 튼튼영어 카세트테이프를 오디오에 넣고선 손때 묻은 교재를 읽고 또 읽었다. 그 시간이 엄마와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차나 보약을 먹으면서 엄마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하루의 시작을 일찍 맞이했다.

    당연히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영어 공부를 하고 아침 식사를 끝내도 등교까지 시간이 남곤 했다. 심심해서 학교 숙제를 했고 책을 읽었다. 영어 듣기마저 다 끝낸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학교 공부를 시작했고 원어민과 소통하기 위한 영어 학원과 읽을 책을 정해서 배부해주는 독서 클럽을 제외하고는 사교육도 받지 않으며 자기 주도 학습이 유행이 되기 전에도 직접 실천한, '범생이' 그 자체였다. (내 손으로 직접 칭찬을 적으니 별로 멋진 사람 같지 않지요? 제가 바로 그걸 바란 겁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모범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하.)





    최근에는 엄마로부터 나에 대한 에피소드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유치원을 다닐 때였다. 학교 병설 유치원을 다니던 나는 두 살 터울 언니가 있었다. 보통 유치원 하교 시간이 저학년의 하교 시간과 비슷했기에 항상 언니와 교문 앞에서 만나 서로의 손을 잡고 고작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집으로 같이 하교했다.


    그날은 비가 다고 한다. 직장에 다니시던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거의 대성통곡을 하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엄청 놀란 나머지, 엄마는 거듭해서 나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울음에 잠식된 목소리로 전하는 이야기.


    - 흐업, 흑, 언니가, 흐읍, 언니가, 학교 앞에 없어, 으아아아아앙


    엄마는 그 이야기를 듣고 피식 웃었다고 했다. 보통은 그 반대 아닌가. 어린 동생을 찾으려 온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마지못해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언니. 그러나 우리 집은 그 반대였다. 나는 그날 우산도 집어던지고 놀이터부터 학교 전부를 뒤지고 다녔고, 다른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놀던 언니는 그날 밤 엄마에게 혼쭐이 났다. 그리고 그날부터 언니는 더 이상 나를 교문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혼자서 누구보다 씩씩하게 손도 들고, 운전자와 눈까지 맞추면서 하교를 정석대로 해냈다.


    그러니 언니보다 내가 밥 짓는 방법을 더 먼저 배웠고, 라면 끓이는 방법도 혼자 익혔으며 오므라이스에 카레라이스까지 만드는 동안 언니는 밥 짓는 방법은 무슨, 라면을 한강 물 수준으로 만들어 꼬들한 라면에 민감한 엄마에게 자주 혼나는 상황은 그렇게 당혹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요리는 전부 내 몫이 되었다.


    그때부터 엄마는 줄곧 "OO아, 언니한테 이거 하라고 해"라던지, "OO아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은데 네가 아빠랑 언니 밥 좀 챙겨줄래?" 등의 부탁을 전하기 시작했다. 아주 자기 주도적 청소년으로 자랐다.


    이렇게 비롯된 일로 학교에서조차 독립심이 강한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칭찬은 나보다 엄마에게로 향하곤 했다. 매년 학부모 상담에 참여한 엄마는 영문도 모른 채 "00(나)를 어떻게 키웠길래 저런 아이가 되나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저 "쟤 스스로 자란 겁니다. 저는 밥만 줬어요"라는 말만 반복했고 어떤 선생님은 '에이 겸손하셔라'라는 표정으로 내가 어떤 사교육을 받는지까지 물어보기도 하다. 교사가 사교육이라니. 엄마는 그 말을 듣고선 '대한민국 부모라면 어쩔 수 없나 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중2. 왼손에 흑염룡이 자라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에 나는 발에 스프링 달린 듯 매일 웃으며 동네를 뛰어다녔다. 엄마가 새로 정착한 직장은 교대근무가 원칙이었다. 즉, 엄마가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 하굣길 어딘가에 가끔 계시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여전히 내 성적에 큰 관여를 안 하셨다. "너라면 어련히 잘할 거야."라는 표정으로 항상 웃고 계셨을 뿐이었다. 사소한 말다툼 한 번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낮은 성적을 받아 속상한 나에게 엄마는 "네가 성적이 낮으면 얼마나 낮겠냐?" 하는 표정으로 내가 주말에 먹고 싶은 음식만 궁금해하셨다. 기숙사 생활로 떨어져 살던 우리는 3년이 흘러 성인으로 마주했다.



 

   내가 사춘기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가 있었다. 감정의 동요가 심한 것 같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나는 그 당시 인생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느라 조금 혼란스러울 뿐,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가족 공동체로서 모두가 함께 보낸 기억은 매우 적었고, 그 순간마저 나의 감정 그대로 표출하며 위태롭게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서로 사랑하기에도 적은 시간이었다.

    선천적으로 내 몸은 약했고, 그만큼 세상은 위험하니 언제 작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마지막을 생각하면 할수록 내게 행복한 순간들이 다가왔다. 죽음까지 생각하는 학생.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1차는 부모님의 직장, 2차는 울산의 한 기숙형 학교, 3차는 서울로 우리는 점차 멀어졌다. 평일 아침마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 가방을 던지며 엄마에게 울며 매달리는 한 아이는 혼자 밥 먹는 법을 알게 되었고, 아플 때 먹어야 할 상비약을 챙기고 다녔으며, 이제는 엄마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성인으로 자라났다.




    - 어제는 하루 종일 방에 있었는데 나한테 전화하더니 나보고 빨리 집으로 와라고 했다니까?

    - 대화라도 했네. 나는 어제 아무 대화도 안 했어!


    작년 서울. 회의가 끝나고 식사 겸 들른 치킨집에서 대결이 일어났다. 지금껏 서울에서 살아온 두 명이 <누가누가 가족과 사이가 서먹한가?>에 대해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둘은 계속 살던 집에서 학교로 통학을 해야 했고 대략 왕복 3시간 되는 거리를 지하철로 오고 가는 것이 꽤 끔찍하다고 말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포크로 떡볶이만 뒤적거리던 나는 그저 부러웠다. 이 사람들 좀 보소. 복 받은 줄 모르다니!


    서울이라는 도시가 내게 괴로운 건 내가 미래에 후회할지도 모를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울산으로 돌아올 때마다 달라지는 부모님 얼굴을 마주하는 게 사무치게 서글퍼서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서 떠나 있다는 게 얼마나 속상한 일인가!




    새벽까지 과제를 풀고 제출하느라 늦게 잔 나머지 아침 7시에 눈을 떴다. 이미 거실은 시끌벅적하다. 야간 근무를 하고 퇴근하신 아버지와 아침 출근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가 부엌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눈을 비비고 (이불 정리랑 방안 환기까지 시킨 후) 문을 열자마자 두 사람이 후다닥 나를 부른다. 눈도 제대로 뜨지를 못해서 얼굴도 잘 안 보이는데 기운으로 이미 두 분이 웃고 계시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 그러면 되었지. 오늘도 이렇게 보내면 되지.

    그렇게 아침의 대화는 나의 운동화 구입과 주말에 울산 어느 곳을 산책할 것인지 결정하며 마무리되었다.



    "너는 내 친구."

    엄마는 나를 낳은 것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잘한 일이라고 했다. "그럼 언니를 낳은 게 첫 번째로 잘한 일이야?"라며 내가 퉁명스럽게 말끝을 걸자, 엄마는 "아니지, 아빠를 만난 게 가장 잘한 일이지. 그래야 너를 낳을 수 있었을 거 아냐."라며 웃었다. 그리고 "사실 한 명만 낳으려고 해서 언니를 낳은 건 잘한 일보다 당연한 쪽이지. 힘들다고 너를 안 낳았다면 인생이 재미없었을 것 같아"라며 답변을 마저 다.


    평생 경기도에서 살던 엄마는 울산 공장에 취업한 아버지를 따라 울산에 정착했다. 그러니 아는 사람도, 가족들도 없는, 심지어 지금껏 살던 곳에서 차를 타고 4시간은 넘게 가야 있는 울산에 엄마는 홀로 남겨졌다. 어리고 외로운 눈나는 매일 저녁 퇴근한 엄마의 우울 표정을 살폈다. 자연스레 누군가를 위로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고 현재의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후회 없을 것만 같은 쪽을 선택했다. 래서 우리가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웃을 수 있도록.

    그러면서 우리는 정말로 조금씩 더 웃었다.


    나는 렇게 대학생이 되었다. 걱정을 할 필요도 없이 여전히 알아서 밥도 해 먹고, 알아서 공부하고, 알아서 용돈벌이도 하는 나를 걱정할 시간에 내일 저녁 식사 메뉴 고민하는 게 더 낫다는 부모님. 이제는 나도 할 말이 있다. "뭐야, 내 걱정 돌려줘요, 아니 덜어(서 나눠) 줘요!" 이렇게 '알아서' 사는 것은 생각보다 외롭다는 것도 느껴져서 요즘은 어릴 적부터 쌓아온 가족 간의 거리감을 일부러 조금씩 좁히고 있기도 하다. 그래 보았자 피곤하다며 투덜거리는 것과, 냉장고에 얼음이 떨어져서 아이스커피를 못 마시는 게 슬프다는, 그런 반항이다.


    뭐 암튼 아직도 이렇게 '알아서' 살고 있다. 이런 내막을 알면 부모님께서 조금 속상하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잘못하신 것은 없다. 나는 그저 이렇게 태어난 독특한 사람이라고 알아주면 감사하겠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애늙은이, 할머니라고 부르긴 한다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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