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회사에서 퇴사했다.
창문 만드는 스타트업에도 입사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중함을 섞어 전달함).
프로 구직러는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왔다, 1년 전 과 다른 점은 1년의 회사 경험과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찍먹했다는 점 정도?
그거 좀 일했다고 여행이 훌쩍 떠나고 싶어져 제주도로 갔다 (더 멀리 가고 싶었지만, 코로나는 모든 하늘길을 막아버렸다).
그 순간에도 나는 매우 조급하게 나의 기호와 상관없이 지원 할 수 있는 모든 포지션에 난사하고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메일 한 통이 왔다 - 글로벌 광고회사의 인턴 면접 제안.
솔직히 나는 내가 그곳을 지원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조급함은 웬만하면 신중함을 가볍게 이겨버린다.
소속감을 원했던 어렸던 나는 면접을 보겠다고 했다, 큰 회사라 사람들에게 소개 하면 나쁘지 않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호텔 옆에 있는 옷 가게에 가서 싸구려 셔츠를 사고, 줌으로 비대면 미팅을 봤다.
어릴 때부터 느꼈지만, 나는 입만 산 놈이다, 거의 이회사 아니면 안되는 사람처럼 절실한 연기를 꽤 훌륭하게 해냈고 면접관은 감동했다.
몇 일 후 합격 통보가 왔다, 퇴사 후에 한 달 남짓한 시간 만에 재취업에 성공했다.
부모님은 코로나 시기, 또 하나의 회사에 합격한 아들을 자랑 스러워했다.
11월 첫째 주에 첫 출근을 했다.
첫날부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광고를 전공한 나는 대충 광고 에이전시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클라이언트가 갑이라면 병, 정 정도 되는 위치라는 것을.
실제는 더 심했다, 밤 9시까지 일하는 건 기본이고, 턴 오버가 하도 심해 인수인계는 불가능했다.
그런 상황 속의 사람들은 피곤함에 절어 예민했고, 서로 싸우는 건 기본이며 인사도 제대로 안 하는 곳이었다 (어떤 분은 과로로 입원했다).
조급함에 대충 간판만 보고 아무 데나 입사한 프로 구직러는 또 한 번 x 됐음을 인지했다.
또 탈출 각을 봤다.
퇴사하겠다고 했고, 매니저는 한국에서 이렇게 책임감없으면 그 어떤일도 못한다고 비난했다.
나의 커리어는 왜 이렇게 험난한가, 불평하고 또 불평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 버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가.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급함을 다스리는 게 내 인생 최대 과업이 되겠구나.
솔직히 지금도 잘못하고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