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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05. 2024

한국의 오르페우스, 유재하

 신형철 평론가의 첫 번째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에 실린 유재하를 다룬 글이 있다. <음악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글은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비견되는 신형철의 '음악철학테제'다. 우둔하고 천박한 음악들에 지친 마음이 다시 그를 찾게 한다고 말한다. 

 한국 대중 음악의 르네상스는 분명 1980년이다. 산업화라는 국가자본주의적 시초 축척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 박통이 떠나가고 전대갈이 온 시대, 대중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대중음악 역시 마찬가지인데, 김현식, 변진섭, 조용필, 이문세, 들국화, 부활 등 쟁쟁한 거인들이 자웅을 가르던 향연의 시대였다.(물론 21세기에 태어난 나에게 유튜브를 통해 조우할 수 있는 음원과 저화질의 라이브 영상에는 한계가 있다) 그 거인들중 가장  보고싶은 거인있다면 유재하라고 할 수 있겠다.


1.성별도, 허세도 없이

유재하의 언어가 2010년대 이후 다수의 힙합이 말하는 '간지'나 양산형 발라드의 '술주정'에 비해 진보하다는 것 쯤이야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다. 차트 조작, 순위조작, 양산형 음악으로 병들어가는 대중음악에 지친 독자들이 80년대 추억의 가요들을 그리워하는 현상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총체적으로 퇴보했다. 도파민을 자극하는 멜로디만 가득하며 하이라이트에 의존한 체, 노래를 질질 끌어간다. 특히 가사들은 시의 꿈을 포기한 체 황폐해졌다. 가수던, 아이돌이던, 래퍼던 아님 락커이던 음악을 하는  다수의 언어는  딱딱해졌다. 저마다 기교-아이돌에게 MR, 래퍼에게는 라임, 락커에게는 고음-로 돌파하는 꿈을 꾸지만 호소에 그칠 뿐이다. 문학이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말의 가장 깊고 다양하며 섬세한 변주 양식이라던 박철화 평론가의 말에 비춰보면 깊지도, 다양하지도, 섬세하지도 않다. 

유재하는 어떤가?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실린 가사에는 시적 꿈이 몽글몽글하다.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커다란 그대를 향해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그 무슨 뜻이라 해도

조용히 따르리오

어제는 지난 추억을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댈 위해

내 모든 것 드릴 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으리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엘범에 실린 표제곡 <사랑하기 때문에>는 한국 발라드의 원형이라고 할만하다. 단순하지만 살아있는 비유, 헌신적이면서도 애절하는 고백에는 이후 수많은 한국 발라드에 모범이 되었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국 발라드란 유재하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유재하의 사랑이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향한 숭고한 사랑으로만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2.가사가 시적 상상력을 함미한다는 것

그대여 힘이 돼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

그대여 길을 터주오

가리워진 나의 길

-가리워진 길 중

만일 그대 내 곁을 떠난다면

끝까지 따르리 저 끝까지 따르리

내 사랑 그대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아요

그대 내 품에 안겨

사랑의 꿈 나눠요

술잔에 비치는 어여쁜 그대의 미소

사르르 달콤한 와인이 되어

그대 입술에 닿고 싶어라

-'그대 내 품에' 중

볼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중

 유재하의 노래에는 솔직한 욕망을 세련된 표현으로 묘사한다.  이 욕망은 단지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성적 갈망이겠지만, 유재하의 노래에서는 세련된 언어로 발설된다. 다수의 힙합이 욕망을 그대로 배설하거나, 다수의 발라드에서 '슬프다'를 '슬프다'로만 말하는 언어 구사와 달리 가사에서 시의 꿈을 꾸는 것이 느껴진다.  사랑하는 그대의 품에 안겨 원초적 결합을 갈망하는 나,그대의 입술에 닿는 체액이 되고 싶은 욕망 등 시적 상상력도 동반한다. 수많은 대중가수 중 몇 안되는 사람이-김광석, 김태원, 신해철-  시의 베일에 쌓인 가사를 쓸 수 있고, 그중에서 최고봉에 유재하를 놓고 싶다.  


3.올페와 유재하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를 듣고 있으면 신화 속 음유시인 오르페우스가 떠오른다. 세이렌의 원정에서 영웅적  면모를 보인 전사 올페가 아닌, 죽은 아내를 위해 저승에 들어가는 시인으로서 올페가 떠오른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와 두 번째 이별을 맞이한 올페처럼, '사랑하기 때문에'는 너무나도 깊게 중독되버린 사랑이 느껴진다. 마치 올페가 에우리디케 손만 잡고 저승을 나오면서 어둠 속 떨고 있을 그녀에게 헌사하는 곡으로 들린다. 그러나 비극적으로 이 노래가 끝나고 유재하는 이 세상을 떠났다. 반대로 올페는 아내를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었다. 유재하의 생애와 올페의 이야기를 비교해보면 정반대이지만 이 두 음유시인은 사랑과 죽음을 통해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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