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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11. 2024

단테 혹은 횔덜린

로맨시스트의 두 타입

축복받으라, 오 천상적인 수목이여, 나로 하여금
  노래로써 가꾸게 하라, 천공의 넥타르의 힘
   그대를 자라게 하고
     창조적인 빛살 그대를 영글게 할 때,

자라나서 숲이 되어라! 한층 정기 어리고
  힘껏 피어난 세계 되어라! 사랑하는 이들의 말
    나라의 말이 되고
     그들의 영혼 백성의 노래 소리 되어라!

-횔덜린, '사랑' 중

 하이데거는 예술을 하는 사람들 중 최고의 위치에 시인이 있다고 보았다. 하이데거가 가장 이상적인 위치에 놓은, 시인 중의 시인은 프리드리히 횔덜린으로, 고향에 대한 향수와 형이상학적인 영원불멸의 사랑을 노래했다. 그의 서사시 히페리온과 단편 시선집 《빵과 포도주》에서는 밝음의 시대에,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비탄의 노래를 하는 시인을 볼 수 있다.  횔덜린을 천재로 본 하이데거의 사상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의 숭고한 사랑시에는 단테를 떠올린다. 어쩌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로맨시스트 시인에게 주어진 길은 두 가지이다. 단테냐, 횔덜린이냐. 단테는 나름 평탄한 삶을 살며, 사회에서 인정도 받고 가정을 꾸렸다. 반면 횔덜린은 주제테 콘타르트(디오타마)를 연모하며 영원불멸한 사랑을 담았고, 결코 에로스가 되지 못한 그녀와의 사랑은 이후 그녀가 죽자 36년 이상을 광기로 살았다. 사실 비참하더라도, 더 매력적인 인물은 횔덜린일 것이다. 기독교적 아름다운 플라토닉 러브보다는 광기로 파멸하는 시인으로 고통받는 것이 사랑에 대한 진정한 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파멸적 사랑 증명은 자기위로 밖에 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단테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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