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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16. 2024

문학과 혁명의 무한화서

 혁명을 위한 문학 선언

-혁명가들을 위한 문학 사용서, 문인들을 위한 문학 사용서     


1.무한화서의 양대 꽃잎, 문학과 혁명     

 화서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켜요. 순우리말로 ‘꽃차례’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는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고(원심성),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이에요(구심성).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이성복, <무한화서>     


 문학과 혁명은 같은 창공을 향해 열려있고, 같은 별을 보며, 같은 길을 따라 걷는다. 걷는 방식이 다를 뿐, 그들은 늘 인간적 가치인 에로스에게 헌사 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점에서 둘은 지금까지 강요된 질서를 급진적으로 해체할 실존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무한히 자랄 수 있는 무한화서다. 두 가지 무한화서는 다른 방식으로 꽃잎을 피운다. 멜랑꼴리를 통한 꽃과 피를 통한 꽃, 그 둘의 색깔은 모두 붉고 향기마저 에로스와 닮아있다. 그 꽃이 가득한 향연이 바로 유토피아이고, 나는 그곳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살 것이다.  

 문학을 경외시한 체, 혁명만 꿈꾸는 자들은 스탈린주의와 그 아류의 기계론으로 몰락한다. 그들의 종착지는 결국 디스토피아이고, 실제로 자본주의와 같은 디스토피아임이 증명되었다. 반대로 혁명을 불가능하다며 현실에 안주한 체 학술적.인문적 각성만 한다면, 디스토피아를 헤테로토피아로 착각하며 결국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둘의 변증법적 조화다. 책으로 대표되는 문학과, 팔뚝질로 대표되는 혁명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인간을 유토피아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해왔으며,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논의할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다. 둘 중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사적유물론적으로 분석했을 때 먼저 물질적 토대가 바뀌어야 한다. 이윤 창출을 위한 착취가 없어져야 가장 기본적인 억압이 없어지며, 하부구조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상부구조를 흔든다. 그러나 하부구조에서 착취가 없어진다 해서 즉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존재론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윤리를 개척해야 하고, 비로소 문학은 쓸모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유토피아에서 문학의 역할이 될 것이다.     


2.유토피아의 사도, 문학

 신형철 평론가가 말하는 몰락의 에티카로서의 문학, 김현 선생이 말하는 무용한 것으로서의 문학은 단지 억압된 사회에서만 유효할 뿐 다른 세계에서는 전위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가령 기존의 질서로는 이해되지 않는 새로운 에티카의 구축에 최전선에 설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랑과 가족의 다양한 형태(폴리아모리, 비혼출산, 난혼, 계약결혼)에 물음을 던지고, 소유하지 않는 사회, 유토피아의 질서를 개척해낼 것이다. 우리에게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던 사회를 이끌 사도, 그것이 유토피아 사회에서의 문학에 대한 테제이다.

 한편 그런 억압 없는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사람이 귀족의 감정을 가진 시인이 되는 사회일 것이다.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아도 되고, 소유를 위해 초과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은 소외없이 자유롭게 사랑하며, 예술을 향유할 것이다. 그러니 유토피아에서는 문학이 활발해질 것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 아방가르드 예술이 부흥했던 것이 강력한 증거다. 물론 스탈린의 반혁명 이후 프로파간다로 전락했으니, 문학이 혁명과 같은 길을 바라보면서도 종속되어 차이를 상실하면 안 될 것이다.      


3. 디스토피아에서 문학의 역할


 억압된 사회에서는 문학은 무용해야 한다. 나는 김현 선생께서 하신 ‘문학무용론’을,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화되지 않는 문학을 고찰한 선생의 통찰력에 깊은 찬사를 보낸다.그러나 분명 문학 무용론에 가려진 한 가지 유용함이 있다. 나는 그것을 문학의 아편성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악으로 취급되는 마약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정말 아편처럼 진통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처럼 선험적 고향 상실을 통해 대신 울어주거나, 시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여 금지된 욕망마저 자유롭게 대신 표현해준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에로틱하다. 포르노가 시청각적인 자극을 주지만, 문학은 정신활동 전체에 자극을 준다. 바타유의 개념을 빌리자면 에로티즘은 사회적 금기 및 금기에 대한 위반에서 금기된다. 문학은 그런 점에서 너무나 에로틱하며, 일시적으로 자본주의 속 구조적 소외를 잊게 한다. 폴 엘뤼아르의 시를 빌려 말하고 싶다. ‘나는 소망한다/내게 금지된 것을’ 그러니 태생적으로 문학은 에로틱하며,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문인들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장르문학이나 시나리오 등을 쓰는 창작자들을 멸시하는 태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 문학은 진통적 효과를 주는 아편이니, 개인의 정신적 차원에서는 나름 유용한 것이다. 유물론적으로는 무용할 지라도, 관념론적으로는 일회적 유용함을 준다. 그러나 진통제에 중독되면 결국 인생이 망가지듯, 문학에 너무 중독되어서는 안 된다고 건방지게 말하고 싶다. 문학은 현실의 특수한 반영인만큼, 현실이 붕괴되어 가는데 문학만 파고 있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순수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은 쓰나미 앞에 서서 시를 쓰겠다는 것과 같다. 쓰나미에 휩쓸려 죽으면 창작도 없는데, 그 단순한 사실을 간과한다. 그러니 분명 현실과 문학은 별개이지만, 현실이 위기에 처한 재난의 시대 21세기에서 몰려오는 재난의 폭풍우를 외면한 것은 이기적인 엘리트주의이며, 결국 우매한 짓이다. 즉, 문학이 정치적으로부터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정치적인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한편 문학적 순수함, 시적 상상력이 때로는 인간을 억압하기도 한다. 지젝이 말했던 것처럼, 카라지치가 시인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이데거와 같은 훌륭한 시인이 고향 상실 타령을 하며 나치에 가담한 것을 보면 문학은 무용하기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 혁명가들은 그런 문인들의 시적 리비도를 혁명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 둘의 연대는 필수적이며, 이 둘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문학은 몰락의 에티카이고, 스스로 몰락하는 자들의 숭고함을 애도한다. 그러나 단지 애도로서 제한되면 그것은 올바른 애도가 아니다. 진정한 애도는 살아남은 자, 희망이 주어진 자들이 죽어간 이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말대로, “오로지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해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져 있다.” 그러니 애도가 끝난 뒤, 우리는 세계에 전력으로 맞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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