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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18. 2024

휴머니스트적 사유의 향연, 《조용한 날들의 기록》


 마르크스의 '경제철학수고'나 바르트의 '애도일기'처럼 저명한 저술가들의 메모나 일기는 훗날 출간되어 책이 된다. 한국어로 된 책 중 이런 책의 본좌는 김현 선생의 《행복한 책읽기》가 있겠다. 그보다 위에 있다고 단언핰 힘들어도 같은 자리에 앉을 만한 책이 있다면, 김진영 선생의 《아침의 피아노》와 《조용한 날들의 기록》을 뽑고자한다.


신형철 평론가에 따르면 산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시의 꿈을 꾸는 산문과 그렇지 못한 산문이 있다는데, 시의 꿈을 꾸려면 시인 혹은 견자 되어야 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껴야 한다. 이때 정서는 늘 깊고 흐느적한 검은 담즙의 상태, 멜랑꼴리여야 한다. 철학자이지만 시의 꿈을 산문을 쓴 멜랑꼴리커가 있다. 대중적 인문학자로, 프랑크프루트학파와 롤랑 바르트 해설로 유명한 고 김진영 선생의 글이 그렇다. 선생의 메모를 모은 산문 《조용한 날들의 기록》은 분명 산문과 아포리즘의 경계에 서있는데, 시의 꿈을 품어 흐느적하면서도 중독적이다. 그의 단상들을 추적하다면 좌파 휴머니스트의 시적 세계를 읽어낼 수 있다. 아포리즘으로 읽어도, 시로 읽어도 매력적인 마성의 언어로 경험과 사유를 풀어낸다. 전체적으로 롤랑 바르트,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향기가 깊게 베여있어, 인문 좌파에게는 반가운 책이 될 것이다.


몇 가지 푼크툽을 소개해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낮에는 우울을 아낀다. 다정한 애인처럼 깊은 밤에 찾아올 수 있도록

-전형적인 멜랑꼴리커의 감성으로 우울을 즐긴다.  밤을 의인화하여 연애를 하는 시적 사유가 돋보인다


먼 생각. 그러자 무엇을 잃었는지가 또렷해진다.

-아포리즘적 문장으로, 김진영 선생의 전공 벤야민의 '기억'이론이 생각난다.


파도를 막는 건 방벽을 높이 쌓는 일이 아니다. 그건 파도만 더 높이 뛰어오르게 할 뿐. 벽은 때로 적들의 도약판이 된다. 사랑도 정치도.

-잠언적인 문장이지만, 시적이다.


며칠째 밤이 낯설다. 밤마저 떠나면 나는 누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나.

-지나친 밝음이 시인을 어둠으로 몰았다는 하이데거의 글이 생각난다. 시인으로서의 견자적 태도로 밤을 맞는다.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것이 사랑과 정치다. 그런데도 그걸 하나로 살고자 했던 이들이 있다. 하이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밤

-숭고하다는 것은 변증법적 세계에서 형이상학적 이탈일 것이다.


감정은 고요할 때 가장 뜨겁다. 그것이 매혹된 감정이다.

-감정의 변증법


다시 밤이다. 혼자다. 나는 다시 우울해지고 침착해진다.

-멜랑꼴리커에게 밤은 무지한 스승이다.


소설이 현실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 소설의 포충망 안으로 현실의 나비가 날아드는 순간을 기다리며 소설을 따라간다. 나는 소설의 눈으로 현실을 노려본다. 소설의 포충망 안으로 현실의 나비가 날아드는 순간을 기다리며.

-김진영 선생의 훌륭한 명서 《전복적 소설읽기》가 생각난다. 현실의 나비, 그것을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밤에 키스하면 안 된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사람은 죽어 있으니까.

-비슷한 표현을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도 본 적 있다. '시적 사랑은 이런 것이다'를 잘 풀어낸 문장으로, 현실에 반하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시에 노래를 붙이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시는 마지막까지 언어일 뿐, 노래가 될 수 없다.

-시의 언어적 댄디즘이 나타난다. 대중문화에 물화되지 않는 인문학적 자부심이 나타난다.


나는 평생 누군가를 숭배해본 적이 없다. 그것이 나의 비운이며 행운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프루스트 앞에서는

-프루스트는 인문학도에게 시간의 신이다. 그 위대한 이름 앞에서는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고 인생을 배운다


확고한 예감   

 나는 결국 치명적인 우울증으로 죽을 것이다.

-멜랑꼴리커는 늘 그렇게 슬프고, 슬퍼야만 한다. 그게 바로 저주받은 운명이다.


정의감이라는 분노만 있고 고통에의 연민은 없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휴머니즘적 단상, 잠언의 자리에 오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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