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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20. 2024

박노해, 언약을 시로 도약하게 하는 마성의 이름

시란 시인의 언어다. 감각과 이성의 층위를 부유하며, 그 중간에 있는 감성의 언어로 내면을 파고든다. 이때 시적 상상력이 운문이나 산문으로 된 언어를 시로 도약하게 만든다. 그러니  시는 기존 질서의 유한함과 다른 무한한 상상력이 토대를 조립하며, 언어적 기교를 통해 완성된다.

그러나 시적 상상력을 갖지 못한 글이라도, 시로 불리는 글들이 있다. 브레히트의 편지를 훗날 시로 승화시킨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비롯한 사연이 담긴 시나, 대중적 언어를 통한 느낌의 공동화 작업을 통해 시로 격상된다. 그러나 내게는 특이한 시인의 필명이 통해 언약이 때로 시로 읽힌다. 내게 필명 자체가 시로 도약을 하게 만드는 마성의 이름은 박노해이다. 그의 언약에는 그 안에 숨 쉬는 셀 수 없던 세월의 눈물과 피가 몽글몽글하게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사랑을 두고 '능력'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가 말하는 능력은 물화되어 타락한 물질적 능력이 아닌, 느낌의 공동체를 형성할 '능력'이다. 박노해의 시는 어떤가? 박노해의 시는 시적 상상력보다 자신의 이름 뒤에 쓰러져간 세월로 시를 쓴다. 그 세월은 너무나도 숭고해 '기억'되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정갈한 언어뒤에 흐르는 치열했던 풍경은 시적 풍경이 된다. 한 마디로 박노해에게 사랑은 증명이다. 자신의 언약을 세월로 증명한다. '널 지켜줄게'라는 낭만적 일상어에, 박노해라는 이름이 붙을 때는 낭만이 과잉하여 흘러넘친다. 이 과잉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에로스는 아레스보다도 용기 있다는 것은 단지 신화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며, 레닌주의자 박노해에게 푸른 아우라를 내려준다. 그 아우라의 이름은 사랑이다. 박노해는 그것을 전력을 다해 증명했고, 그러니 사랑은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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