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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Feb 23. 2024

위선적인 낙태 에티카에 도전, 영화 <더 월>

 위선적인 낙태 에티카의 파괴, 영화 <더 월>  


 문학이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불안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의식을 평온하게 하는 문학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요

-안토니오 타부키, 레퀴엠 중     

  영화는 문학은 아니다. 다만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글로 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문학의 꿈을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적인 영화는 어떤 층위에서 문학의 꿈을 품었다고 볼 수 있는가? 나는 ‘고뇌’를 하도록 만드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 <더 월>, 원제 ‘If These walls could Talk’는 그런 층위에서 충분히 문학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낙태’는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단어이다. 아직까지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기 어려운, 비밀스럽고 음지에 머무는 단어이다. 분명 한국에서 낙태의 역사는 길고, 근대화 이후 체계적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한 자녀 정책을 펼쳤던 군사독재 시절부터 조직적으로 행해졌고, 늘 계획되지 못한 임신은 ‘불행’이었다. 물론 달가운 이름은 아니라, ‘어둠’속에서 행해진 낙태, 특히 80년대까지 행해진 여아 낙태는 한국 사회가 생각해 볼 만한 문제임은 분명하다. 민주화 이후, 여성 운동의 성장 하에 점차 낙태 합법화 목소리가 나왔다. 특히 촛불의 힘을 얻어 당선된, 자칭 페미니스트 대통령 문재인 시절 낙태 전면 합법화를 기대했지만, 조건부로 타협되었고 아직까지 미프진-낙태약을 둘러쌓고 해결되지 못한 쟁점들이 많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도 낙태권 운동이 성장하면서 분명 여성들의 임신중단권을 점차 획득해나갔다. 물론 의료비 지원 제외 등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많으며, 특히 미 대선을 앞두고 인공수정을 위해 만들어진 냉동 배아를 태아로 봐야 한다는 미국 대법원판결이 나오는 위기의 상황이다. 이런 시기에, 영화 <더 월>은 ‘낙태’를 타자의 문제로 생각하기 쉬운 남성들에게 타자에 대한 이해의 매개로, 낙태 결정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여성에게는 실존적 문제로 작용하는 낙태에 대해 모두 고뇌하게 만드는 문학적인 영화다.      

 영화는 세 가지 에피소드의 옴니버스식 구조로 되어있다. 각기 다른 인물, 상황, 시대이지만 원치 않은 임신한 평범한 여성들에게 ‘낙태’는 여전히 잔혹한 문제로 남아있다. 그간의 낙태권 운동이 사회적 시선을 ‘불법에서 부도덕’ 수준으로 ‘개선’시켰다. 그러나 여성들의 고통은 여전하고 그런 여성들의 고통을 두고 개선이라는 표현이야말로 부도덕한 폭력인 것이다. 이 영화는 여과 없이 낙태 수술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혈흔과 비명으로 낙태를 부도덕하다고 말하는 시선과 맞선다. 이전까지 낙태 쟁점에서 단지 말로만 전면 합법화를 말하던 내게도 느낌의 층위를 파고드는 장면이었다. 연출되었지만 결코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그 피로 물든 장면은 내 안의 어설픈 ‘에티카’-낙태를 부도덕하고, 금기시하는 이 사회가 만들어낸- 를 파괴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법적으로 낙태가 허용되더라도, 경악스러운 기독교 우파들의 반대 시위로 대표되는 반동적인 낙태 반대 운동과 세력은 여전히 잔존해 있다. 특히 해피 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결말 부분에서 급작스러운 ‘살인 사건’은 단지 영화적 허구가 아닌, 현실의 특수한 반영이다. 우파들의 괴상한 에티카 테제-낙태는 살인이다-의 말로는 결국은 살인으로 끝났다. 이것은 은유적 표현일 것이다. 임신 중단을 선택한 여성들을 향한 조롱과 혐오로 죄책감 및 모욕감을 야기하는 정신적 살인에 대한 표현으로 읽힌다. 이런 점에서 기존 ‘에티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이 영화는 분명 명품이다. 문학적인 표현과 영화적인 세련된 연출기법이 만들어낸 이 영화는 분명 예술적 시네마이고, 그런 의미에서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는 96년에 개봉했지만, 이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며 특히 낙태 반대를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트럼프가 부상하는 지금도 너무나 유효하게 다가온다. 문학적인 영화는 관객에게 허망한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몰락하는 현실에서 구원을 생각해보도록 하게 한다. 영화 초반, 짧게 스쳐 지나가는 낙태권 투쟁 장면에서 그 정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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