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곰돌이 Jul 24. 2023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시지프 신화 리부트  

인문학과 마주보기 2. 실존주의와 마주 보기

1. 삶의 의미  

여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계를 단지 변혁시키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이다. 슬프게도 마르크스주의에는 인생론은 공허하기만 하다.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인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최우선 지향점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검토할 문제는 과연 노동 계급의 해방이 개인의 자기 해방으로 이어질 수 있냐는 것이다. 자의로 태어나지 못한 인간의 한 번뿐인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해방이다. 


2. 인생이란 무엇인가?

위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해야 한다. 인간은 자의가 아닌 타의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자의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현존재의 인생인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첫 번째 부조리이다.

 어쩌면 이것은 카뮈의 《시지프 신화》의 문제의식과 통한다. 세계변혁을 어떻게 시킬지 보다 인간에게  중요한 질문은 삶을 살 가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질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계를 변혁하라고 말하겠지만, 슬프게도 그러한 대답은 삶의 주체성을 상실한 질문이다. 실존주의자에게는 세계보다 자아가 우선한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인간은 타의로 태어났더라도, 자의로 살아갈 주체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현존재이며, 반대급부로 불안을 느끼더라도 다른 존재들과 달리, 고등의식을 통해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러한 고등의식은 세계에 생존 본능을 맞춰 사는 동물들과 달리, 현존재에게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목적의식적 활동인 노동을 할 수 있다. 즉, 노동은 목적의식을 가져야 하는 활동이기에 이것은 삶의 목적을 인간 스스로 설정할 수 있음에 근거이자 인류 문명 성립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은 목적의식적 행동인 만큼 자기 해방의 수단이다.


3. 인생의 현실적인 부조리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인간에 대한 찬가로 끝을 내고 싶지만, 인간의 해방을 가로막는 두 번째 부조리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부조리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소외 이론과 일치한다. 모든 것을 물질화시키는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한 생산력을 보여주지만, 그 어두운 저편에는 노동자를 착취하여 움직인다. 모든 것을 물질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심인 주체성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문명이 발전한 이후 인간 최대의 문제이며, 자본주의가 확립된 이후 극대화되었다. 자본주의는 그 특유의 부조리함 때문에, 이제는 생산력이 인류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시대에서는 사라져야만 하는 야만적인 체제이다. 자본주의는 손안에 있음(Zuhandenheit)에 있는 모든 존재를 소외시킨다. 노동자는 착취당하고, 자본가는 자기 소외를 당하고, 그럴수록 지구는 파괴되어 간다. 이러한 현대 문명-자본주의 시대를 하이데거의 용어로 빌려 표현하자면, 고향 상실의 시대다. 고향에서의 인간은 계급이 없이 상호부조의 원리에서 협력했다. 그러나 문명이 들어서며 생산력 발전을 위해 계급 분화가 시작되었고,  주체적인 삶 수 있던 고향은 문명 발전의 과정에서 상실되었다. 자본주의는 고향을 상실케 했다. 고향을 잃은 존재는 소외를 겪는다. 본래 인간은 첫 번째 부조리-타의로 태어난 존재-를 극복하기 위해 삶을 목적 지향적으로 설계하는 노동을 할 수 있게 태어났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을 상품화시키며, 결코 자유로운 노동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자본주의라는 틀 안에서 인간의 노동은 주체성을 상실한 체, 자본이 주체가 되어 노동한다. 이것이 바로 삶을 부조리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문제이다.


4. 자기 해방과 노동 계급의 관계

 그렇다면 삶을 의미 있게 만들려면, 자기 해방을 이루어내야 한다. 즉, 주체성을 회복해야 자기 해방을 이뤄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불균등 체제이기 때문에 자기 해방은 홀로 이뤄낼 수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을 구속하는 자본의 쇠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 유일한 자본의 쇠사슬-부조리함을 벗어나는 방법은 자살이다. 그러나 자살은 해결책이 아닌 도피다. 자기 해방에 대한 좌절의 결말이 자살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주체성 회복을 위한 자기 해방을 하려면 인간은 체제와 싸워야 한다. 체제를 함락시켜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으로서의 시대에서, 노동을 주체성의 실현과정으로 되돌려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해방을 실현할 것인가? 단일한 개인으로서는 체제를 변혁할 수는 없다. 개인이 아닌 계급으로서 맞설 때만 체제가 변한다. 따라서 체제를 변혁시킬 잠재력이 있는 유일한 계급인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차별받거나 평범한 사람들의 혁명을 통해야만 체제를 변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 계급 해방은 자기 해방에 선행한다. 자본주의의 총체성으로 지구 내에서 자본주의가 손을 뻗지 않은 곳은 없으며 사회적 동물인 인간 자기 자신은 결코 해방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자, 정확히는 주체주의자인(*subjectism) 내가 마르크스주의자로 살아가는 이유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기 해방을 위한 도구이며, 가장 강력하면서도 유일한 수단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가 살아 숨 쉬는 동안, 불멸한다. 잠시 불씨로 잠을 자더라도 1917년 러시아처럼, 1968년 프랑스처럼 결정적인 순간에는 불길이 되어 춤을 춘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주의란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는 자유다'라는 사르트르의 분석은 유효하며, 체제에 대한 부조리를 인식한 존재라면 누구나 사회주의의 불씨가 될 자격이 있다.


5. 자기 해방이 노동 계급 해방보다 선행될 수 있는가

  그러나 자기 해방이 노동 계급의 해방보다 선행될 수 있다는 유구한 두 가지 전통이 있다. 하나는 지배 계급의 논리, 하나는 관념론의 논리다.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신봉하는 어리석은 지배 계급은 근면을 통한 부의 축적이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일정 정도의 자본을 축적해 자본계급이 되어 경제적 자유를 얻을 때, 자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경쟁의 원리이며, 수많은 존재들을 가스라이팅 시킨 믿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의 근원적 문제는 경제적 자유가 자기 해방이 아니며, 그것은 주체성의 상실이다. 오직 자연을 목적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노동만이 주체성을 구현하는 수단이지만, 자본을 통해 타인을 착취하거나 자본 자체의 자가 증식-불로소득-을 통해 누리는 '경제적 자유'는 삶의 주체성을 상실한 것이다. 자본이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 것인데, 노동으로부터 벗어났다며 자기 해방이 도래했다는 어리석고도 천박한 믿음이다. 삶의 주체를 상실한 체, 자본이 삶의 주체가 될 봐엔 자살이 어쩌면 현명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전통인 관렴론 역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기독교의 구원이고, 이것에 대한 안티테제 격인 쇼펜하우어-니체로 이어지는 불교식 열반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을 자기 해방의 걸림돌로 보고 음악을 통해 일시적 해방-그리고 열반을 통해 자기 해방을 누릴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열반이 가능하다는 불교적 관렴론은 사실 비판이  힘들다. 그러나 그만큼 실천이 힘들다. 그러나 사실 어쩌면 열반이 자기 해방을 하는 유이한 수단인 것은 인정한다. 


6. 시지프 신화 리부트

 그리하여 살아야 하는 이유는 주체성의 회복이다. 시지프는 주체성의 회복을 위해 산꼭대기로 돌을 굴린다. 그 과정이 끝나지 않는 신화와 달리, 노동 계급의 국제적 혁명이 돌을 정상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돌이  정상에 향하면 인간은 자기 해방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힘들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더라도, 정상에 돌을 굴리는 여정이 자기 삶의 주체성 회복이라는 것을 느낄 때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투쟁은 자기 해방을 위한 과정이며, 마르크스주의로 귀결되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프로메테우스,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마주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