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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Mar 07. 2024

저자의 죽음의 즐거움,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저자의 불을 훔쳐 독자에게,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동문선 출판사


 프랑스 지식인 중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있다. 철학과 사회학 분야에서 푸코가 그랬다면, 문학과 기호학에서는 롤랑 바르트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1967년 작성된 굴 <저자의 죽음>은 바르트 사상의 '인식론적 전환'을 가능케 한 훌륭한 텍스트이다. 발자크의 작품을 예시로 들며, 저자의 의도를 해석하는 기존 비평을 거부하며, 더 나아가 심지어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다. 글쓰기는 저자의 의도와 시대적 배경보다 근본적으로 독립적으로 받아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은 가히 혁명적이다. 기존 작품의 비평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한 해석에 불과했다면,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은 저자의 강력한 위치를 없애고 글쓰기 신화를 거세한다. 말라르메르, 발레리, 프루스트 등의 시도를 계승한 바르트의 선언은 텍스트와 작가를 분리한 기존 주체 개념을 해체한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으로, 독자에게 텍스트를 열어준다. 한마디로, 저자를 죽이면서 독자를 낳는 오이푸스적 선언으로 읽힌다.


 동문선 출판사에 실린 <텍스트의 즐거움>은 <저자의 죽음>과 문형으로 된 산문  <텍스트의 즐거움> 을 비롯한 여러 대담집이 실려있다.  그래서 1967년에 발표된 <저자의 죽음>과 이 글을 바탕으로 발행된 <텍스트의 즐거움>은 현재 신비평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바르트 후기 사상을 대표한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사랑의 단상>이나, <밝은 방>처럼 짜임새 좋은 논문보다는 문형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밀도와 불문학에 대한 기본적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 있어 읽는데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바르트 사상의 정수인만큼 기쁘게 음미할 수 있었다.

      

 바르트는 텍스트의 즐거움은 변명하지 않으며, 결코 설명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즐거움의 텍스트는 행복한 바벨탑이며, 독자가 즐거움을 취하는 순간 텍스트의 독자는 형벌이 아닌 언어의 공존을 즐길 수 있다. 한편 이런 즐거움이 반드시 승리에 찬, 영웅적일 필요는 없다. 즐거움은 표류의 형태를 띨 수 있고, 탈장소적일 수 있다. 바르트의 연보를 볼 수 있듯이, 의외로 좌파 진영에서 비난받았는데, 그래서인지 텍스트의 즐거움 자체를 우파의 것으로 규정하며 지식, 방법론, 참여, 투쟁을 강조하는 좌파 진영을 상식에 도전한다. 즐거움은 오성과 감성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는, 혁명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바르트에게 텍스트는 물신의 대상이며, 또 이 물신은 자신을 욕망한다. 그래서 제도로서의 저자는 이제 죽었지만, 자신은 텍스트 안에서 저자를 욕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서를 하는 동안 비평 계보로 치면 신비평에, 문예 사조로 치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저작을 충분히 즐겼던 것 같다. <사랑의 단상>처럼, 두고 두고 책상 위에 놓는 하나의 문형으로 삼고 되새겨야겠다.


2024.2.29

(2월 마지막날, 방학의 마지막날을 맞아 집근처 파주 가람도서관 열람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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