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풍요와 궁핍의 변증법, 《내 무덤, 푸르고》
세기말 풍요와 궁핍의 변증법, 《내 무덤, 푸르고》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왜 존재하는가를 나는 모른다.
-횔덜린, <빵과 포도주> 중
시인들의 시인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이런 질문을 한다.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왜 존재하는가? 최승자 시집 《내 무덤, 푸르고》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듯 하다. 존재하니까 존재한다고. 90년대 초 소련이 붕괴되고, 민주주의가 안착되는 반면, 물질문명은 정점에 달했다. 하이데거는 기술문명이 지배하는 현대를 궁핍한 시대로 보았는데, 자본주의의 풍요가 가져다준 물질문명은 가장 화려하면서도, 공갈빵처럼 공허하다. 80년대 말부터 세기말 전까지, 자본주의에 대한 탄식과 허무를 느끼는 시인들이 많았다. 80년대를 강타했던 박노해와 백무산이 자본주의 속 소외를 말했다면
기형도, 유하, 최영미 등의 90년대 시인들은 물질 자본주의의 공허함을 말했다. 공허한 시대, 너무나 공허한 시대, 시인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시인은 목숨밖에 없다. 《내 무덤, 푸르고》는 물질문명의 풍요로움 속 목숨하나만 붙잡고 갖고 써온 시다. 수록된 <마흔>이라는 시에서 볼 수 있듯, 시인은 중년 여성의 입장에서 이제는 중년이 된 자본주의 세계와 마주하는데, 그 감정은 불안이나 불쾌함을 관통하는 허무감이다.
중년이 되어 인생의 존재론적 허무함과 자본주의 역시 정점에 이르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문명의 본질 허무함 속 시인은 괴롭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묘사(미망 혹은 비망8), 똥에 대한 키치(미망 혹은 비망1), 그리고 패러디적 웃음(귀여운 아버지)을 통해 세계를 전복하는 웃음을 짓는다.
한편 이 시집은 <미망 혹은 비망>이라는 16편의 연작시로 시집을 연다. <미망 혹은 비망>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혹은 잊지 않기 위한 대비라는 뜻이다. 정녕 잊을 수가 없어서인지, 혹은 잊어버리면 안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세월이라는 불변적 진리에서, 시간은 시를 통해 망각과 기투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시인은 무거워진다. 던져진 즉자에서 시를 쓰며, 대자에 이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나왔듯이, 허무한 세계 속 무거워지는 방법은 이데올리나 사랑 등이 있겠지만, 시인에게는 시이다. 앞에서 던졌던 횔덜린의 물음에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시를 쓰기 위해 존재한다"
(2024년 공허한 3월 두번째 주, 죽음의 급행열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