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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pr 02. 2024

문학자가 남긴 세상에 대한 사소한 부탁들

황현산 《사소한 부탁》

문학자가 남긴 세상에 대한 사소한 부탁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프랑스 문학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문학 평론가이자, 나 같은 일개 문학도에게는 번역가로도 익숙한 이름이다. 그 유명한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철》,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을 황현산 선생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같이 비교되는 불문학자인 김현의 경우 문학사회학적 비평과 주례사 비평이 특징이라면,  황현산 선생은 조금 더 대중적인 문체와 현실 문제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 돋보인다. 그의 유명한 첫 번째 산문 《밤이 선생이다》에서는 문학 지식인으로서 느꼈던 수십 년간의 사유가 담겨있다면, 《사소한 부탁》에서는 세상과 문학을 연결시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문학자로 사소한 일을 부탁한다.

 《사소한 부탁》은 2010년대 이후의 세상과 문학 및 대중문화에 대한 산문집이다. 《밤이 선생이다》의 경우에는 여러 시대를 걸친 글들이 담겨있기에 사유가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진보적 지식인으로의 사명과 경험이 묻어있지만, 내게는 다소 낯선 시대 이야기이라 온전히 공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산문에는 세월호, 용산참사, 헬조선 논쟁, 쌍용차 사건 등 익숙한 현대사이자 내 인생사의 여러 장면이 떠오른다. 문학자의 오래된 경험이 더해진 묵직함이 있으면서도, 인문학적 정신-불행한 시대에 구원가능성 모색-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아직 날카로움은 살아있다. 특히 대중적 산문이라 학술적이기보다 기자의 글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현실 정치, 사회 쟁점, 고전과 현대 문학 등 다방면에서 깊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인문학적 사유를 진행한다. 불문학자답게 랭보, 보들레르, 폴 엘뤼아르, 생택쥐베리 등의 이야기가 등장해 문학적 향기가 분분하나, 지적 허영보단 담백하고 적절한 사용이 돋보인다. 특히 펑론가의 글이라고 하기에는 심히 '겸손'함에도, 자신의 글에 대한 신뢰가 있어 보인다.

 인상 깊은 글로는 <여성혐오’라는 말의 번역론>으로, 불문학자로 근현대 천재 문인들의 여성관을 추적하는 글이다. 댄디스트인 보들레르-랭보 역시 문학적 천재성과 달리, 여성을 차별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여성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나는 한 사람의 번역가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그 오해 속에 묻어버리려는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라고 하며, 번역가 이전에 타인의 고통에 다가가는 공감의 비평가로서의 사유를 느낄 수 있었다.

<표절에 대하여>도 흥미롭다. 신경숙 표절 논란을 기점으로, 표절에 대한 선생의 정의를 내리며 현세태를 비판한다.

" 표절의 지적은 작가에게 가장 불리한 정보라고 나는 벌써 말했는데, 이런 정보가 늘 극단적인 형식으로 제시되어 맹렬한 바람에 실릴 때만 소통된다는 것도 이 사회의 비극이다. 무거워진 정신상태는 저마다의 각성으로만 가벼워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라고 하며, 표절에 대한 개인을 넘은 사회적 문제임을 강조한다.

 이 산문집은 평론가임에도, 장식을 위한 거창한 수사 대신 담백한 대중적 문체로 친절한 글이 담겨있다. 대부분 글이 원고지 10장 분량 정도되는 글들의 모음이라 길지도 않다. 김훈 작가의 담백함과, 김현 선생의 해박한 지식의 중간 지대에 있는 산문집인 것 같다. 투병하며 쓴 산문이라고 하나, 빼어난 완성도에 경탄을 하며 문학자의 사소한 부탁에-언어는 사람만큼 섬세하고, 사람이 살아온 역사만큼 복잡하다. 언어를 다루는 일과 도구가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한글날의 위세를 업고 이 사소한 부탁을 한다. 우리는 늘 사소한 것에서 실패한다.-경청하며 사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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