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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ug 10. 2023

아우라 상실의 시대, 벤야민<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오늘날 매체미학의 기본 전제가 되는 논문이 있다. 바로 ‘예언자’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품시대의 예술작품>이다. 이 50여 페이지에 이르는 철학 에세이는, 현대 매체미학, 고전 마르크스주이 미학, 포스트모던 담론에 모두 선구적인 역할을 한 글로서, 기술복제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 글을 개괄적으로 보자면 첫 번째 부분에서는 기술복제가 예술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다(p100)라며 시작하며 역사가 발전하면서 기술 복제의 수준이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1900년대에 이르자 기술적 복제가 이전과 달리 획기적으로 발전해, 복제 기술은 복제를 대량화함으로써 복제 대상을 대량으로 나타나게 한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와 달리 예술 작품에서 제의보다 전시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음 부분에서는 사진의 복제 가능성에 대해 주목한다. 과거에도 고전적인 형태의 인쇄술은 있었지만,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사실상 무한히 복제될 수 있다. 그래서 사진의 발달은 아우라의 붕괴를 시켰다고 본다. 그렇지만 아우라 붕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아우라 붕괴는 소수만 누릴 수 있는 진품성이라는 종교적 제의를 제거함으로써 예술을 대중에게 개방했다며 긍정적으로 본다.  

 다음 부분에서는 영화에 대한 논의를 한다. 영화배우는 카메라를 통해 연기가 보여지는데, 무대배우에게 주어져있는 가능성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오직 전시 가치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대중적인 예술 매체인 영화에 대해 매우 높게 평가한다.      

기술복제시대는 아우라 상실의 시대

 철학자들마다 현재 사회에 대한 정의가 다르다. 하이데거에게 현대란 고향 상실의 시대라면, 벤야민에게 현대란 기술 복제의 시대이며 곧 아우라 상실의 시대이다. 미학자 진중권의 해석에 따르면, 아우라(Aura)는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고 한다. 책에서는 그냥 독특한 분위기라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허구적인 관념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원작을 추구하여, 아우라를 느끼려는 것을 종교적 제의라고 한다. 그래서 기술복제시대에 들어오면서 이 허구적인 아우라가 이전과 질적으로 다르게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벤야민은 이런 현상을 긍정한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은 철저한 유물론적 관점으로 예술작품에 접근한다.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대가인 루카치가 신고전주의의 관점에서 이런 아우라에 찬양하는 것과 달리, 벤야민은 예술을 소수의 것으로 만드는 진품을 추앙하는 고전적 예술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그래서 원본 따위 의미가 없이 스크린과 영사기만 있으면 된는 영화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분리된 사진의 예술적 가치와 학문적 가치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영화가 지닌 혁명적 기능에 주목한다. (137p)     

공산주의는 예술로써 파시즘과 맞서고 있다

 이 책이 쓰여진 1930년대 유럽에서는 파시즘의 위협이 현실화되었다. 파지즘은 새로 생겨난 무산계급화한 대중을 이 대중이 폐지하고자 하는 소유관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은 채 조직하려고 한다. 대중은 소유관계 변화를 요구할 권리가 있지만 파시즘은 소유관계를 그대로 보존한 채 그들에게 표현을 제공하려고 하며, 그 결과 정치적 삶의 심미화로 치닫게 되었다.(p147) 그런 정치의 심미화의 최고봉은 전쟁이다. 파시즘은 “세상은 무너져도 예술은 살리라”라는 기술에 의해 변화된 지각의 예술적 만족을 전쟁에 기대한다.(p150) 그런 점에서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심미화 상황이다.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맞서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공산주의가 예술의 정치화로써 맞선다는 부분이 애매하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스탈린주의냐-마르크스주의냐), 구체적으로 어떤 전술을 통해 맞서는지도 나오지 않은 채로 결말을 맺는다.

 이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유물론적 검토를 통해 영화를 혁명의 매개체로 파악한 점은 의미가 있으나(물론 같은 프랑크프루트학파인 아도르노는 이를 비판했다), 실천으로서 방법이 너무 추상적이다.      

 아우라 상실의 시대, 아직도 아우라는 유효하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그 가치는 사라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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