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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ug 11. 2023

스무살, 한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기 위하여

*이 글을 통해 감성에 이끌려 사회주의자로써 살던 과거와 인식론적으로 단절을 할 것을 선언하며, 이성의 원칙에 따라 한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것임을 전환하고자 함을 선언하는 글이다.


   내 존재 방식은 인간주의자, 실존주의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이다. 각 사상은 교집합이 크기도 하고, 어쩌면 모순될 수 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저 세 가지 사상이 모두 자유와 사랑에 대한 헌사를 하는 인간주의의 정신과 통한다고 생각하며, 인생에 세 가지 축으로 자리 잡았다.


1.인간주의

 '인간을 인간답게"를 주장하는 인간주의는 본인의 존재 방식을 사람으로 규정한다면, 누구나 인간주의자여야만 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신학이, 오늘날에는 야만적인 자본주의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데 방해한다. 모든 학문이던, 기술이던 인간을 위해서 헌사해야 하지만 오늘날의 기술과 학문 모두 자본을 위해 존재한다. 재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당연히 자본주의를 옹호할 수 없다. 이윤 중심의 체제인 자본주의는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기는 물화를 하며, 체제 내 모두를 소외시킨다. 따라서 휴머니즘의 기본적 테제인 테제는 '휴머니즘은 반자본주의'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보다 낫다고들 하겠지만 당신들이 제시한 자칭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소련, 중국, 북한, 쿠바 모두 국가자본주의다. 독재 체제의 자본주의일 뿐, 노동 계급이 해방된 사회주의가 아니다. 


2.실존주의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여성에게는 여성다운 역할을, 남성에게는 남성다운 역할을 요구하며 본질에 갖힌 체로 살라고 한다. 인간은 타의로 태어날지라도, 자의로 살아갈 권리를 지닌 현존재인데 본질에 맞추어 사는 것이야말로 반인간주의적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본가로 하여금 노동자를 타자화시켜 도구로 전략시킨다. 즉 자본주의가 '노동자는 일하고 자본가는 착취하라'는 본질을 정해두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지옥처럼 느껴지는 이유이다. 본질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노동자는 사실상 출퇴근 하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산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본질을 정하려는 자본주의에 맞서 스스로 참여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즉, 현실에 앙가주망하여 인간다움을 되찾아야 한다. 

 개인이 현실에 앙가주망할 때 수 많은 타자를 만난다. 그러나 개인은 타자와 같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개인이 앙가주망을 하면, 특정 집단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집단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므로, 이 집단은 공통으로 하는 가치와 지향하는 목표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집단의 성격을 수용함으로써 그 집단 속 타자들과 '우리'가 될 수 있다. 즉, 이 과정을 통해 집단의 의식이 나의 의식가 일치함으로써, 더 이상 타자들이 아닌 '우리'가 될 수 있다. 


3.마르크스주의

 그렇다면 어느 집단에 참여해야 겠는가? 야만적인 경쟁 체제 속 소외를 가속화시키는 자본가 계급인가? 아니면 야만적인 경쟁 체제를 끝낼 잠재력이 노동자 계급인가? 이런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선구적으로, 가장 과학적으로 발견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따라 참여해야 한다. 특히 세계의 야만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잠재력을 지닌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하는 전위조직에 참여하는 것이 궁긍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선두에 서는 것이다.


4. 자유와 사랑에 대한 헌사를 위하여

 그리하여 나의 방법론은 마르크스주의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필수적이고, 그렇기 위해 혁명을 위해 헌사하는 삶을 살았고, 살아갈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부르주아 명상 철학들과 달리, 학습하라, 선동하라, 조직하라의 원칙에 따라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여야 한다. 혁명, 그리고 사회주의는 절대 이상적이지 않다. 다만 너무 멀어 지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린다. 소유적 사랑을 추구했을 때는 사랑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존재적 사랑을 추구하며 그 사람이 행복한 사회, 소외되지 않은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지친 마음의 거처로 삼는다. 내 삶의 목적이자 원동력은 그 사람의 존재이고, 스스로 그 사람을 위해 헌사하겠다고 결의했고, 판단했고 무엇보다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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