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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ug 27. 2023

흉악 범죄의 원인과 해결책: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해결책 고찰


1.

신림역, 서현역에서 끔찍한 흉기 난동이 벌어져 가슴 아픈 희생이 있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무차별적 살인에 희생된 피해자들의 명복을 빈다.


 주류 언론에서는 가해자 개인을 악마화시키고, 정부는 묻지 마 범죄를 막기 위해 권위주의적 조치를 강화시키려 한다. 범죄 예방은 단순히 권위주의 조치 강화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런 가정이 유효하려면 공권력이 강한 브라질, 미국에서는 흉악범죄가 없어야 한다. 이들은 마약조직 소탕을 위해 전쟁에 준하는 작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결코 마약 조직을 뿌리 뽑을 수 없었다. 즉, 채찍만으로는 범죄를 완전 뿌리 뽑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범죄의 원인을 뿌리 뽑지 않고, 결과만 보고 공권력 강화로 해결하려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닐뿐더러, 대중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려는 지배계급의 더러운 욕망의 발현이기도 하다.

 즉, 중요한 것은 재발 방지이다. 재발 장지를 하려면 원인을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흉악 범죄의 원인, 특히 최근 이유가 되는 묻지 마 범죄의 원인이 무엇인가?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서로 접점이 크지 않다고 여겨진 두 가지 철학적 사조인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로 살펴보려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다수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개인적으로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함께 가며 서로 상호보완의 관계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1. 실존주의적 관점: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프랑스 실존주의의 거두인 카뮈의 유명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는 삶의 의미에 관해 다룬다. 이 책의 핵심은 '삶이 의미 있는가'에 한 질문에 대해 의미 있다고 하면 살면 될 것이고, 부조리를 깨달아 없다고 생각하면 자살하지 말고 내적인 부분에서 의미를 찾아 극복하라는 것이다.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대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거나, 찾더라도 그 의미에 다가서기보다 현실에 좌절한다. 그렇기 때문에 '잃을 것이 없기에', 사회적 비난과 처벌을 감수하고도 흉악범죄를 저지른다.


 추가적인 설명을 위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본래 타의로 태어났지만, 자의로 살아갈 권리를 지닌다. 이것이 현존재로서 인간 고유의 특징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 동시에 불안함을 느낀다.


 달리 말하면, 인간에게는 정해진 본질이 없다. 오 로직 실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인식하고 자유롭게, 삶을 자신의 목적에 맞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본질을 정한다. 학생이 되면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고, 성인이 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커리어를 쌓거나 시험을 준비해야 하고, 직장을 가져 일정한 나이가 되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모든 원인은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착취당해야 하며,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해야 하는 잔인한 메커니즘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에게 흔히 말하는 여성 다움을 요구하는 것도,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축하는 것도 생산성 극대화를 하기 위한 본질 규정의 흔적들이다.  자본주의는 때로 원래 정해진 본질을 훼손하기도 한다. 특히 자본주의는 노동의 본질 훼손이 심각하다.    인간이 능동적으로 자연을 목적의식적으로 활용하는 신성한 활동인 노동을, 단지 생존수단으로 격하시켰다. 그래서 노동자는 노동을 하더라도,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흉악 범죄를 막을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사실 실존주의는 실존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공통점이 없을 정도로 워낙 다양하고, 실존주의의 선배 격인 생철학 자체가 개인의 의지를 중요시 여긴다는 점에서 실존주의가  사회적 해법이 아닌 개인적 차원의 해법에 가깝다. 우선 카뮈에 입각해 분석해 보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외부적 요인이 아닌,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즉, 명예, 자본, 사랑 같은 요인보다 실존, 그 자체로부터 찾으라고 한다. 이것이 카뮈의 철학에 입각한 해결책이다. 카뮈 철학이 기본적으로 니체의 인생론에  대한 각주에 해당하는 부분이 많아 개인적 차원의 해법을 강조한 점이 크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적 해법도 중요하다. 실존주의 기조에서는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을 통해 사회적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앙가주망이란 쉽게 말하자면, 사회 참여를 하라는 것이다. 그의 후기 저서 <변증법적 이성비판>에는 이에 관한 부분이 나와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타인을 만나는 순간 자신과 다름을 느끼게 된다. 이때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 타자화를 시키며, 곧 타인은 지옥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타자화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은 특정 집단에 참여해 집단과 자신과 집단 및 구성원들과 동일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에게 본질이 정해질 부조리에 처한 사람이 참여할 집단은 어디인가? 자본주의를 가속화시킬 자본주의인가?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자이고, 사회주의를 스스로 목적으로 삼는 자유라고 한 만큼 혁명적 사회주의의 흐름에 참여할 것을 말한다.


2.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인간을 소외시키는 잔혹한 체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기본적으로 범죄를 개인의 탓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다른 진보적 사상과 마찬가지로, 범죄자를 처벌보다 교화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중점을 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신성가족>에서 "범죄는 개별적인 차원에서 처벌돼서는 안 되며 반사회적인 범죄의 원천들이 제거돼야만 한다.”라고 하며 해결책을 사회 구조로부터 찾았다. 이것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개인은 사회와 동떨어질 수 없는 존재이며 개인의 범죄 행위는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족한 생산력을 만들어 낸 체제이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그것의 어두운 저편을 본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부분은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를 소외시키는 체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외란 언론에서 주로 사용하는 사전적 의미의 '따돌림'보다 더 광범위한 의미를 지난다. 마르크스는 그의 초기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철학 수고>에서 자본주의에서의 소외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의 핵심을 요약하면 노동의 소외이다. 노동의 소외는 노동자들을 통제불능으로 만든다. 노력해서 부를 쌓으라는 이 자본주의는 이 사회의 다수인 평범한 노동자들의 육체와 정신 건강 모두 파괴한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부를 쌓기 위해 피로에 찌든 체로 카페인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삶의 고단함을 잊고자 알코올로 마무리를 한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는 계속 쌓여만 가는데 적당히 스트레스를 풀지 못하면 언젠가 양질전환을 하여 폭발한다. 즉, 자본주의의 소외는 노동자를, 더 나아가 체제 속 모든 대자존재를 통제불능으로 만든다. 우울증 및 대다수의 후천적 정신질환의 주범은 체제이다.


  범죄라고 지칭되는 일탈적 행위 중 통제불능이 아닌 범죄는 극히 드물다. 일부 신념을 가진 사상 범죄를 제외하면  본인의 신념보다 통제할 수 없는 감정(극도의 분노, 극심한 우울)과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이 범죄를 야기한다. 즉, 자본주의 속 대다수의 범죄 원인은 체제가 개인을 소외시켜 통제불능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범죄의 숨겨진 가해자임은 명백하다.

 따라서 범죄는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는 한 끊임없이 터질 것이다. 이것은 다른 차별 문제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가 종식되지 않는 한 범죄 역시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우파들은 기본적으로 범죄의 원인을 개인에게서 찾는다. 따라서 교화가 아닌 '처벌'을 목적으로 한다. 만약 개인이 문제라면,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을 처벌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태어난 대로 처벌하자는 것 역시 말이 우생학적인 관점이며 말이 안 된다.


 따라서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실존에 대한의미 상실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노동의 소외를 해결해야 흉악 범죄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규정하는 내가 흉악에 대한 해결책으로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으로 분리해서 제시할 수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책은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앙가주망'을 통한 실존에 대한 해결책이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에 대한 의미 상실은 곧 자본주의가 말하는 소외와 통한다. 통제불능의 흉악범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존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해야 하며, 실존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해결책은 앙가주망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겪는 부조리함-소외는 타자와의 차이 때문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명언처럼 타자화는 개인을 지옥으로 만들기 때문에, 타자로 존재한 집단과 동일화를 하기 위해 앙가주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인 나는 변혁적 집단에 참여하는 것이 실존에 대한 최상의 존재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해결책은 에리히 프롬이 제시했던 '사랑'이다. 그의 명저 《사랑의 기술》에서는 실존에 대한 해답으로 사랑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분리로 인한 불안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대부분 사람이 사랑의 본질을 사랑을 받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데, 사랑의 본질은 주는 것이다. 그의 후속작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자본주의는 인간을 소외시켜를 소유 상태로 만들며, 사랑마저 소유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혁명을 통해 사회구조가 변혁되면 일반 개인도 변한다고 했지만, 프롬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존재 상태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한다.

 흉악범들은 대부분 애정결핍 상태이고, 그들의 과거를 보면 가정이던, 이성이던 애정이 심각하게 결핍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애정결핍 역시 자본주의의 산물이며, 무엇보다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사랑에 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에서 사랑을 해야 하며, 이것은 설레는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약속이자 결의이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다면히 구조적 변혁을 해야 한다. 개혁으로는 아주 약간 완화시킬 수 있을지라도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라는 무한 경쟁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노동의 소외를 낳고,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 착취는 개인을 소외시켜 통 저 불능으로 만들어 잔혹한 흉악 범죄를 조장한다.


 흉악범죄를 뿌리 뽑으려면, 야만적 체제를 변혁해야만 한다. 총체적 관점에서 자본주의가 흉악범죄가 주된 이유인 것은 맞으나, 그에 따른 개인적 실천 역시 중요하다. 사회가 변혁되어야 개인도 바뀌지만, 개인마다 의식이 불균등하기 때문에 사회가 변했다고 해서 개인이 반드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개인적 실천을 통해 실존에 대한 의미를 찾으며 소외를 극복해야 하며, 사회적 차원에서 무엇보다 체제가 변혁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앙가주망을 통한 사회 변혁이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는 억지 가정하에 범죄를 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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