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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ug 09. 2024

박상수 《귀족예절론》

《귀족예절론》, 2000년대 이후 한국 시단의 젊은 감정의 귀족주의자들에 관하여


  2000년대 이후, 정확히 말해 2005년을 전후노 등장한 젊은 시인들이 있다. 강정, 이현승, 하재연, 진은영, 이장욱, 이근화, 김행숙, 박상수 등의 당시 등장한 젊은 시인들은 기존의 시의 흐름과는 다른 감각으로 저마다의 시세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한국 현대시 작법의 '정석'인 오규원 선생의 《현대시작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아방가르드함은 다시금 시란 무엇인지에 대해 되풀이하여 묻는다. 비평가들은 2000년대 이후 젊은 시인들의 등장을 저마다의 용어로 지칭한다. 가장 유명한 명칭인 권형 '미래파'를 비롯해, 신형철의 '뉴웨이브', 이정욱의 '다른 서정', 김수이의 '다른 서정'까지 다채로운 상찬의 말들로 젊은 시인들의 등장을 찬송한다. 그중에서도 미래파로 불리는 시인이자 비평가인 박상수의 《귀족예절론》역시 젊은 시인들을 분석한 글이다. 젊은 시인으로서의 감각과 비평가로서의 따뜻한 날카로움이 살아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2005년에서 2011년 사이에 실린 글들이다. 박상수 비평가는 이 당시 등장한 젊은 시인들이 1997견 IMF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도래하기 전, 정치적, 경제적 무풍지대를 통과하며 전 세대의 '슬픔-책임'이라는 자아의 윤리에서 비로소 풀려났다고 말한다. 자아를 덜어내 주체로 개방하고 다른 목소리를 들여오는 미적 실험을 감행할 여유를 허락받았고, 그래서 이전과는 다른 급진성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1부에서는 비평가로서 이들의 출현을 예찬하는 글들이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글은 책의 제목 이기도 한 《귀족예절론》이다. 이 글은 감정의 귀족주의자들인 젊은 시인들을 분석한 글이다. 과거 90년대 소설 속 주인공들의 특성으로 대디즘을 강조한다. 댄디즘은 보들“남과 구별되고자 하는 욕망”이 “자기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태도이지만, 문제는 엘리트주의적인 태도와 여성혐오적 여성관이다. (댄디즘의 주창자인 보들레르와 뉴댄디스트인 오스카 와일드 모두 해당된다) 미래파로 불리는 젊은 시인들은 이러한 가치관과 동떨어져있고, 고정된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항 대립에 갖혀있지도 않다. 그래서 박상수 평론가는 이들의 우아한 감정의 귀족주의를 댄디즘으로 부르기보다 귀족예론자로 부른다. 귀족예절론의 자질로는 '항상 몸가짐은 가만히, 부드럽고 조용하게', '법칙을 세우고 자신을 통제하며', '우아함, 그리고 나르시시즘이라는 시종을 거느리고', 고양이를 좋아할 것을 말한다. 박상수 평론가는 댄디즘을 재해석한 귀족예절론자들이야말로 (대다수)임금노동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더라도 예절을 통해 인간의 고귀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댄디즘이 기본적으로 정치적으로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댄디즘이 반자본주의라는 뿌리를 공유하더라도 좌우로 해석될 수 있다.하나는 보들레르처럼, 대중을 혐오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우파적 맥락이다. 어쩌면 댄디스트의 주류는 우파였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랭보처럼(여성혐오라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지만) 부르주아를 경멸하고 억압받는 민중과 노동자에게 형제애를 느낀 좌파적 맥락이다. 박상수 평론가의 귀족예절론은 2000년대 시인들의 사유를 분석해 재해석된 좌파적 댄디즘으로 읽힌다. 자본주의의 배설물인 인간 소외를 문학으로 승화한 귀족예절론은 시인들을 위한 방법론일 수 있겠다. 그 취향 공동체를 들어갈 수 있을까하는 의문, 그리고 재난의 시대에 그 취향 공동체는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교차한다.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어 시를 요리하는 평론가가 되고자 하는 나에게 이 의문은 꾀나 무거운 것 같다.
2024.08 서귀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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