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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ug 14. 2024

20세기를 닫는 문학 비평, 남진우 《숲으로 된 성벽》

시인의 시선으로 써진 비평에는 마력적인 힘이 지배한다. 남진우의 산문들을 보면 그렇다. 문학비평가 신형철 산문에 따르면 시의 꿈을 꾼 산문과 그렇지 않은 산문이 있다고 한다. 남진우의 산문은 마음껏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갈망으로서 문학을 조망하고, 진리에 접근하기 위해 인간의 언어로서 도전하고 있다.
  세기말에 나온, 지금으로부터 사반세기 전에 나온, 평론집 《숲으로 된 성벽》은 시인으로서 육감적으로 파악한 사회의 총체적 위기를 비평으로서 풀어내고 있다. 서문에서는 마음속에 일어난 다양한 형태의 파문들을 있는 그대로 옮겨려고 했다고 말한다. 감히 그 완성도를 논할 수 없겠지만, 시인의 시선으로 본 시원을 유려한 문체로 옮겨놓았다. 매혹적인 문체라는 형식에 한 번, 그 형식이 담고 있는 진실된 영혼에 한 번 홀리게 된다. 세기말의 시점에서 써진 이 비평에는 세 가지 경향을 포착할 수 있다.

 하나는 시적인 유려한 문체이다.  시인의 산문답게 남진우의 글은 인간의 언어로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모순적 작업의 산물이다. 속세에서 영적인 체험을 표현하기란 극히 어렵지만 시적인 산문으로 그 작업에 도전하고 있다. 종교적인 개념들을-사원, 폐허, 종말, 영혼, 낙원-자유롭게 펼쳐가며 '신들이 떠나간 시대'의 공허함을 산문으로 표현한다. 이는 남진우의 처녀시집이기도 한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에서도 느껴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두 번째로는 공허함이다. 80년대가 적대와 분노로 가득한 시대였다면, 90년대는 감정적으로는 허무함-사회로 공허함을 느낄 수 있다. 남진우는 시인우노서 감성의 언어로 그 공허함을 노래했다면, 비평가로서는 이성의 언어로 공허함을 풀어내기도 한다. 특히 1부 비평에는 그런 공허한 기조가 자리 잡고 있다. 90년대 흐르는 공허함에 대해 소설적 반영으로는 댄디즘을, 시적 반영으로는 네 가지 경향-축제, 구도, 유희, 투시-을 들고 있다. 특히 이런 시대를 폐허를 향해 열린 문으로 표현하며, 종말을 유예하는 시의 탄생을 고대하고 있다.
 인상 깊은 글로는 기형도 비평인 <숲으로 된 성벽>과 김영하를 분석한 <나르시시즘/죽음/급진적 허무주의-김영하의 소설에 대해 말하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는 그들의 허무주의를 분석한다. 특히 기형도의 시를 '미완의 매혹'으로 칭하고, 김영하의 소설관을 '급진적 허무주의'라고 부른 점 역시 흥미로운 지점이다.

 세 번째는 문학의 위기에 대한 염려이다. 평론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문학의 위기를 사반세기 전 포착한 듯했다. 90년대 민중시는 소산 하기 시작했고,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는 그런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있다. 이어 등장한 대중문화를 최전선에서 즐기는 압구정 오렌지족의 등장으로, 문학은 대중문화에게 많은 자리를 내주었다. 그래서인지 왕가위의 영화처럼 문화가 문학에 영향을 준 것, 하루키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댄디에 젖은 소설들을 보면 문학의 쇠퇴를 말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가 선구적으로 느낀 문학의 쇠퇴는 사반세기 이후에도 도저히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세기말을 닫는 비평, 남진우는 문우 기형도의 명시 《숲으로 된 성벽》을 빌려, 세속의 도시와 단절된 문학이라는 숲으로 된 성벽을 치려고 한다. 후기자본주의의 물화를 견뎌내는 공동체를 통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는 현실 속 일종의 헤테로피아를 건설하려는 시도였을까? 전에 읽었던 2010년대 발행된 《폐허에서 꿈꾸다》에서 문학 속 헤테로피아를 추적하는 것을 보니, 그 꿈은 이미 세기말부터 꾸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물화를 견뎌내는 성벽에 견고함을 더하는 문인들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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