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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ug 16. 2024

현대사 거인의 산문, 염무웅《지목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현대사 거인의 산문, 염무웅《지목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염무웅이라는 우리 시대의 평론가가 여든을 맞이하여 낸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를 읽었다. 염무웅 선생의 업적이야 본지에 적기에 너무나도 거창하지만 백낙청 선생과 함께 창비를 대표하는 거성이자, 민중문학을 대표하는 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문학도에게는 사실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원로 문인이기 때문에 신성들에 비해 접할 기회가 없었고, 특히 민중문학론이 안타깝게도, 정말 안타깝게도 오늘날에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한 물간 흐름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가령, 김현의  《행복의 시학》, 《현대 프랑스 비평사》는 배운 적 있더라도, 백낙청 선생의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은 배운 적 없다. 그렇지만 사회를 수호하기보다 과감히 변혁되길 염원하는 꿈을 품고 있기에 백낙청 선생의 평론을 읽었고, 거기에 간간히 등장하는 염 선생의 이름에 매혹되어 그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를 접했다.

 서문에서 밝히길 여든을 맞이해 평론집을 낼 것을 제안받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직과 노화로 인한 시력 및 체력 등의 문제로 인해 그동안 썼던 산문들을 모은 산문집으로 방향을 전환했다고 말한다. 책 제목은 독일의 저명한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이 내한했을 당시 한국인터뷰어에게 했던 말이라고 한다. 이는 공산주의자였던 비어만이 ‘사회적 정치적 이상이 남김없이 실현된 낙원을 억지로 건설하려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한 말이다. 이 말에 공감한 저자가 우리의 현실이 지옥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 담긴 제목이다.
 물론, 스탈린주의의 패배는 인류 해방 사상인 공산주의의 패배가 아니다. 사회적 정치적 이상은 건설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보는 급진적 문학도인 나에게는 패배주의가 느껴지는 안타까운 제목으로 느껴진다. 노장의 투지를 기대하고 읽었던 산문집 서문에서 적힌 일종의 패배 선언은 당황스러웠다. 현실은 유토피아가 불가능하기에, 헤테로피아라도 구축해야 한다는 뉘앙스의 제목은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단지 관조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문인으로서 할 일을 하고,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선생의 노고를 알고 싶어 중단하지 않았다.


 1부는 60년대부터 문인 활동을 하던 선생이 기억하는 세상을 뜬 문인들에 대한 글들이다. 조태일, 김규동, 김윤수, 김용태, 권정생 등의 일화가 적혀있다. 처음 듣는 이름이 많았지만, 당대 문인들과의 추억은 오늘날 문학도인 나에게 귀중한 글이었다.

2부에서는 정치적인 글들로, 문인으로서 목소리를 낸 <용산선언문 3제>이라는 서명이 인상 깊었다. 현실은 외면하고 당나귀를 타고 아니리로 향하는, 밀실의 문인들과 차별화된 '광장'의 문인으로서의 기품이 느껴지는 글이다. 그 외 <문인의 역할과 작가회의의 나아갈 길>과 <한국문학, 경계선 너머로 한 걸음 내딛다> 역시 원로 문인으로서 사회에 내는 목소리는 음유하는데 좋은 글이다.

3부에서는 통일과 한국사회에 대한 강연록과 기고문들이 적혀있다. 그중 <독일 통일의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이 인상 깊다. 백낙청 선생의 의견과 비슷하면서도, 계속해서 되풀이하여 민족과 통일을 다루고 있다.

4부는 정치적 성격이 돋보이는 글들이다. 이승만 시대부터 박근혜 시대까지 살아온 선생이 박근혜 퇴진 운동을 보고 기고한 글인 <혁명적 목표를 비혁명적 방법으로>와 <촛불을 들고 역사 속으로>가 인상 깊었다. 촛불을 축제로 보는 선생의 시선에는 진보적 민중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소외되던 일상의 주중과 달리 광장의 주말은 해방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전설의 서울대 60학번으로(김현, 김승옥 등 4.19 세대) 한국 문학 발전에 헌신해 온 거인의 산문은 동경하며 읽었다. 그것이 거인에 대한 예의니까. 그러나 정치적으로 비판적 지지를 할 부분은 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입장, 통일에 대한 견해 등의 차이는 있다. 이는 대체로 창비의 민중문학론에 대한 내 비판점과 같다. '해방을 위한 문학'이라는 큰 틀은 동의하더라도 전술에 대한 차이는 분명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일종의 사료로서 1부와 2부는 현시대의 문학도에게 귀중한 면이 있다. 거인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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