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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ug 17. 2024

<타락천사>에 관한 노트

<타락천사>를 감싸고 있는 두 가지 포장지를 벗겨보자.

하나는 영상미, 전형적으로 왕가위스러운 현란한 테이크와 엥글을 통한 혼란을 미로서 승화시킨다. 흑백 처리와 네온 조명 등 영화에 있어 다소 무지한 나의 여린 시선을 사로감았고, 거기에다가 적절한 사운드로 타락하는 느낌을 들게 한다. 영화란 매체가 시각과 청각에만 호소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데 왕가위 영화, 특히 <타락천사>만큼은 이를 초월한다. 불쾌한 향기가, 낯선 여자에서 느껴지는 그의 향기가 느껴진다.


다른 하나는 배우들의 센슈얼함이다. 본래 에로틱이나 섹시라는 수식어로 배우들의 아우라를 칭송하고 싶었지만, 자칫하다가는 영혼이 아닌 육체에만 한정된 표현으로 오인될까 센슈얼함으로 표현했다. 여명, 이가흔, 금성무에게서는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 조화를 통해 느껴지는 아우라의 끌림이 느껴진다. 여명의 지나친 쿨함, 이가흔의 광기어린 집착, 금성무의 답답한 묵언 역시 모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보다 영화의 서사가 주는 깊은 층위에 도달하기 위해 두 가지 미학적 베일을 걷고 본다면, 영화는 타락한 현대인들의 초상을 담아냄을 감지할 수 있다.



얼굴도 모르는 킬러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에이전트, 그리고 그 에이전트의 관심을 알면서도 성과주체로서 정진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인간적 감정을 포기한 킬러 황지명. 황지명이 킬러라는 잔혹함보다 인간적 감정의 꽃인 사랑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인 사물화된 존재이다. 에이전트 역시 너무나 그를 사랑한 나머지 광기어린 집착을 했고, 결국 이별을 통보한 그를 죽인다. 소유하지 못할 바에는 방생이 아닌 차라리 살인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양상의 광기는 모두 소외의 산물이다. 소외는 무감정과 집착이라는 양극적 광기를 낳았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신자유주의적 고속 성장을 한 홍콩은 분명 빛났다. 그러나 그 밝음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한 그림자가 본래 '천사'를 타락시킨 것이다. 끊임 없는 물질 자본주의의 생존 방식으로 '청부살인'을 택한 두 명의 주연. 그러면서도 먹고살지 못해 아르바이트를 할 때가 있다는 황지명의 말은 킬러마저도 궁핍한 시대를 보여준다. 더욱 수입을 늘리기 위해 스스로 사물화를 택해, 인간의 증표인 감정을 거세하는 황지명은 21세기 물화된 인간들의 선구적 표본이다. 그렇기에 인생은 더욱 공허하고, 그런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황지명은 작중에서 계속 흡연한다. 그렇지만 피면 필수록 폐만 허해질 뿐, 본질적 허함은 매워지지 않는다. 그런 허기를 달래줄 에로스를 충동적으로 매혹되지만, 정신적 교감이 이뤄지지 않은 에로스가 지나간 자리는 더욱 공허하게 느껴진다. 더욱이 그런 충동적 에로스는 자신을 갖지 못한 여인의 분노를 야기해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왕가위의 영상미는 이런 공허한 시대의 비참한 죽음을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마력을 가졌다. 사랑도, 죽음도 모두 그의 영화에서는 평등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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