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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ug 21. 2024

하루키에 관한 노트

 단순하게 하루키 소설을 탐닉한다면, 그의 소설의 편린으로 술, 음악, 그리고 섹스를 들 수 있을 깃이다. 이러한 일차원적 포착은 하루키의 세계를 지나치게 요약해 곡해에 이를 수 있다. 진정으로 하루키라는 우물을 보려면, 표면이 아닌 그 안의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미약하게나마 포착한 하루키의 우물에 흐르는 세 가지 파문을 포착해 산문으로 옮겨본다.



*남진우와 장정일이리는 국문학의 정점에 오른 이들의 성스러운 사유를 일부 차용했음을 밝힌다





첫째, 뛰어난 산문가로서의 자질이다. 하루키가 소설가 이전에 갖는 탁월한 산문가로서의 재능은 번역이라는 거대한 장애물 따위 밀고 전진하는 단아 함이다. 언어를 초월해 술술 읽히는 하루키의 산문은 마치 하루키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진토닉과 같다. 진의 은은한 향기가 나면서도 토닉워터의 탄산감과 레몬의 과향으로 알코올을 덮는 마력의 칵테일처럼, 어느새 고요한 향기로 우리의 뇌에 스며들어 간다. 와세다대학 문학부에서 연극을 전공한 탓일까. 유독 등장인물 간의  대화의 비중이  높아 가독성이 좋으면서도, 일상적 언어로 환상을 구현해 내는 그의 문장력은 가히 경이롭다. 한국의 수많은 소설가들이 그의 소설을 탐닉하고 변주를 가장한 표절하는 이유는 소설가 이전에 산문가로서의 탁월한 문장력에 있다.



둘째, 상처로 숨 쉬는 주인공이다. 등단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드러난 특징으로 쥐 삼부작으로 불리는 《1973년의 핀볼》과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이어진다. 주인공들은 상실이라는  크고 깊은 상처를 품은 체 살아간다. 연인 혹은 간음 상대의 죽음, 친구의 죽음, 부모와의 결별 등 주위 지인의 상실을 겪는다. 게다가 사회 역시 그들의 상처를 보담듬기 보다 상처에 소금을 뿌려온다. 70,80년대를 바탕으로 한 하루키 소설의 시대는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와 격렬했던 학생운동마저 상실한 시대이다. 탈정치화가 가속화되고 사물화 현상이 지배한 당시 일본은 가장 풍요로우면서도 극악으로 궁핍한 시대이다. 그 시대는 오늘날 미화되어 재소환되기도 하나, 타락한 시대이며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도 닮아있다. 그러한 상실이 시대에, 하루키의 초상이 담긴 주인공들은 혁명을 말하며, 최전선에서 투쟁을 통한 모범적인 극복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 김진영 선생님의 저작의 제목을 하나 빌려 표현하자면, 상처로 숨 쉬는 것이다. 모진 상실감의 바람에 찢기더라도, 봉합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숨 쉬며, 도시에서 목청껏 목가를 부른다. 이것이 댄디로서,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하루키의 세계관이다. 즉, 하루키의 소설은 섹스나 술로서 상실감을 달래지만, 잃어버린 고향으로 회귀 불가함을 깨닫고 부른  목가의 비애이다.



셋째, 안개와 같은 모호함이다. 하루키 소설에 특징으로 호명되는 것 가운데, 오컬티즘이 있다. 물론, 오컬트 역시 그의 세계를 표현하는 키워드 가운데 고점에 위치하겠지만, 예외적 경우가 있다. 그를 상징하는 《노르웨이의 숲》과 등단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경우 오컬트와는 거리가 있다. 그렇기에 오컬트는 하루키의 작품에 빈번하게 드러나는 특징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를 포괄하는 특징으로 안개 같은 모호함을 들고 싶다. 이때 모호함은, 인위적인 연기처럼 이질적인 모호함이 아니라, 소설에 녹아들어 세계 자체를 흐리게 한다. 가령,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처럼 저마다 산발하는 이야기의 총합으로 진행되는 구조나 가상의 미국 작가 데릭 하트필드의 등장이 그렇다. 스콧 피츠제럴드와 함께 언급되니 더욱 현실에 껴있는 안개와 같다. 이후 전개되는 그의 소설 세계 역시 안개가 전염되어 있다.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양의 정체는 안개에 숨은 듯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없고,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주인공의 경험을 통해 안개와 구름이 구분되지 않는 고원에서의 스산함을 느낄 수 있다. 상상계와 상징계를 흐리는 그의 세계에는 늘 안개가 자욱하고, 그런 안개는 허무함을 증폭시킨다.


하루키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이용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룬 소설을 써낸다. 소설은 반복되는 구조, 간결한 문장 그리고 난해한 이야기라는 일관된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루키라는 이름 앞에 포집되어 마력을 발휘한다. 그 마력은 국경을 넘어 한국에서도 통하고, 유독 사랑받는 이유가 하루키의 소설이 우리의 방황하는 영혼을 그려낸 초상이 아닐까 싶다. 국내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포착한 영혼의 방황을, 하루키는 일본사회에서 선구적으로 발견해 소설로서 반영했다. 영혼이 방황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본질적 소외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영원히 하루키의 소설은 한국 문학에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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