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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Aug 26. 2024

명곡으로 인문학하기

명곡으로 철학하기      


 "시는 더 이상 문학의 중심이 아니며 문학은 이제 더 이상 문화의 중심이 아니다. " 이 서글픈 선언은 어제가 아니라 사반세기 전인 1998년에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에 의해 이미 쓰였다. 시가 떠난 자리에는 가요가 차지했다. 물론, 짤막한 감성글이나 유명인들의 아포리즘 역시 시의 자리를 일부 대체하고 있지만, 시의 대체자 중 가장 강력한 문화적 후계자는 가요일 것이다. 시와 조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보통 교과서를 통해 김소월, 윤동주, 백석 등의 서정시를 잠시 접하는 것 외에 시를 접할 기회조차 없다. 반면 늘 가요는 우리 곁을 배회한다. 홍대나 압구정 같은 도심 번화가부터 적막한 변두리 카페까지 오늘날은 현대인은 대중가요 사회에 살고 있다. 세대론을 지지하지 않지만, MZ세대라는 젊은 세대들은 김수영이나 김소월의 시 한 편 암송하지 못하지만, 아이돌이나 유명 발라드 가수의 명곡 정도는 외우고 있다. 이런 현상을 좋다, 싫다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평가하기 힘들겠지만, 시를 시원의 언어로 여기는 개인으로서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단순히 가요를 무시해서도 안 된다. 물론, 음원 차트에 오른 가요 중 상당수가 공갈빵 같다. 단지 가수의 음색과 유행하는 멜로디라는 건조한 형식에, 무의미한 가사들은-외래어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과 저급한 라임들-예술보다 양산형 상품으로 느껴진다. 그렇지만 한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가요 중 정말 귀중한 가치를 지닌 예술작품 역시 드물게 등장한다. 흔히 명곡이라고 부를 만한, 예술적인 가요들은 충분히 시적이고 대중의 취향에도 부합하는 예술작품이기도 하다. 시에 담겨있는 인문학의 편린을, 명곡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그러한 편린을 포착해 인문학적 사유를 진행한 글들이다. 시가 꾸었던 꿈을, 가요가 꾼다는 점에서 인문학을 충분히 논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고, 자유롭게 써 내려갔다. 여러므로 부족한 부끄러운 글이지만, 명곡으로 불리는 가요를 인문학적으로 논하는 작업은 꾀나 가치있는 작업이다. 단지 가요를 미학적 층위가 아닌 사회의 특수한 반영임을 전제하고 접근한다면, 가요는 우리 시대에 울려퍼지는 미네르바 올빼미의 울음소리가 아닐까 싶다.   

 물론, 필자가 음악에 관해서는 무지한 면이 크다. 부끄럽게도 음악에 관한 본격적인 공부는 물론 악보마저저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하고, 다룰 수 있는 악기 역시 없다. 단지 인문주의자의 시선에서 가사를 음미하고 느낀 점을 적어 낸 산문이다.

 필자가 가진 개인기는 매우 조약하기에, 당연히 거인의 어깨에 올라갔다. 나열하기에 많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눈을 뜨는 법 역시 망각하지 않았다. 발터 벤야민, 게오르크 루카치, 에리히 프롬 등 근대 사상가들의 작업을 많이 빌렸다. 그 외 <사물의 철학>으로 인문학적 사유를 보여준 함돈균 평론가, 거리의 철학자인 강신주 박사,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된 김진영 선생님의 작업들이 없었다면 이 글도 없었을 것이다.

 책을 어떻게 구성할까 여러 층위에서 고민했지만, 쉽게 시대별로 구분했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이후로 구분해 저마다 시대의 음악들을, 시대에 맞춰해석했기 때문이다. 물론 신비평이나 저자의 죽음이니 하는 다양한 해석법이 있지만, 이러한 역사주의적 접근은 가요에서 만큼은 필연적이다. 대중과의 거리가 소설가나 시인에 비해 너무나도 가깝기 때문에 잘 팔리는 음악은 가요의 가장 큰 미덕이고, 그 미덕은 시대에 맞춰 형성되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 시대에 울려 퍼지는 명곡이 우리가 갈 길을 일러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서문을 마친다. 황혼이 되기 전에 미리 우는 미네르바 올빼미의 울음소리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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