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기에 밖보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도서관, 버스, 카페 딱 이 세 곳에 중점적으로 있으면서 책을 읽었다. 학기 중에는 시간에 치여 도전하지 못 했던 장편소설, 평론집, 이론서 등 다양하게 읽었고, 그 중에 육감적으로 나를 매혹시켰던 책 몇 권을 소개한다. 이 책들 외에도 대략 석달 동안 30권에 조금 못 미치는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양이 아닐까 싶다. 학기 중에 더 책 읽을 시간이 있었으면 한다.
1. 푸시킨 <예브게니 오네긴>
: 러시아 문학을 탐닉하며 방학 동안 <죄와 벌>과 <부활> 등 대문호들의 저작을 읽으며 함께 읽었는데, 그 중 가장 정점에 있지 않나 싶다. 소설이 아닌 운문 서사시이면서도 소설의 역할(문제적 개인의 재현)을 한다. 사실상 주목할 만한 마지막 서사시이자 최초의 사실주의, 러시아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많지는 않지만 러시아 거장들의 책을 한 번씩은 건드려본 내가 읽은 책들에 관해서는 러시아 근대 문학 최고의 걸작이라 단언하겠다. 물론, 한국어라는 번역의 산맥에 막혀 운율의 아름다움까지는 느낄 수 없었다. 이 시를 유년 시절부터 읽어온 러시아 사람들이 처음으로 부러웠다.
2. 김경식 <루카치의 길>
‘발터벤야민규’라는 닉네임을 쓸 정도로 벤야민을 좋아했는데, 루카치 앞에서는 그의 이름을 망각하고 말았다. 게오르크 루카치를 조지 루카스로 읽는 웃픈 시대에, 루카치의 저작을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어쩌다 <소설의 이론>에 매료되면서도, 그 뜻을 차마 다 이해하지 나를 루카치의 길로 이끌어줬다. 루카치 전문가 김경식 자유연구자가 쓴 책이라 루카치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초기 낭만적 반자본주의자로서의 ‘문제적 개인’으로서의 방황하던 영혼이 어떻게 공산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서술하는 최고의 루카치 입문서이다.
3.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2>
헌책방에서 우연히 본 전설의 이름에 끌려 읽게 되었다. 1권이 아닌 2권을 읽게 된 것은 2권 밖에 없어서인데, 보충 자료로 백낙청TV를 시청했다. 확실히 김현과 김윤식이라는 우리 문단의 거인들과 대적할 수 있었던 백낙청 선생의 광활한 사유에 감탄하게 되었다. 70년대 쓰여진 글이지만 해외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국문학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가장 주요한 위치에 놓인 <민족문학의 현단계>보다 <리얼리즘에 관하여>와 <1983년 무크운동>이 더 관심이 갔다.
4. 남진우 <숲으로 된 성벽>
시인이 쓴 비평에는, 낙원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의 심정이 담겨있는 것 같다. 세기말 공허한, 너무나도 공허한 시대에 시인으로서 병객의 고통을 산문으로 풀어낸 것 같다. 사상적 은사인 김헌에게 헌정하는 비평, 한국 문학의 낯선 손님으로 왔으면서도 너무나도 깊게 파고든 하쿠치에 대한 글, 편애하는 윤대녕에 대한 글, 그리고 자신의 벗인 기형도에게 헌사하는 글 모두 산문의 향기를 일깨워 준 글들이었다. 비평가로서 시적인 문체를 구사하며 인공낙원을 구축한 남진우 시인을 보며, 시인이야말로 모든 예술가의 경지에 오른 존재임을 다시금 알게 된 비평집이다.
5. 황석영, <돼지꿈> (소설집)
이 책을 읽기 전 부커상 후보작에 올라 화제가 된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를 읽다가 중단한 적이 있다. 전통적 리얼리즘과는 괴리된 환상적 리얼리즘에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초기작을 읽었다. 한국형 리얼리스트의 성채를 건축한 황석영의 걸작을 보며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다. 문학이란 것이 정말로 써먹지 못할 것은 아니구나. <객지>, <몰개월의 새>, <삼포 가는 길> 등 그의 단편은 분명 단편이면서도 루카치가 말한 ‘로망’으로서의 장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진실로 경이롭다.
6. 횔덜린 <휘페리온>
마약을 해본 적도, 할 일도 없지만 진실로 마약을 하고 쓴 작품인 것 같다. <빵과 포도주>에서 지 잘난 맛으로 사는 우리의 횔덜린의 작품 중 유일한 소설인 이 작품을 읽고 있으니, 마치 내가 휘페리온이 되어 그리스에 온 듯 했다. 혁명과 사랑이라는 이중 과제에 모두 실패한 휘페리온이 자연과의 합일을 이룬 것을 보며, 목가적 삶에 대한 동경을 다시금 품게 되었다. 슐레겔이 말한 ‘절대소설’에 부합한, 소설 이상의 소설을 보여준 인류 문학의 경전에 오른 글이라고 생각한다.
7. 김하영 <오늘날 한국 노동계급>
무더운 한 철이 가기 전, 그래도 혁명에 헌사 할 수 있는 책 한 권, 그것도 가볍지 않은 교과서와 같은 책을 읽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읽은 책, 세계를 변혁할 노동계급으로서의 가치를 일깨워 준 책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도표를 비롯해 객관적 수치로 증명하는 학술적 사화과학 서적을 그리 선호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책만큼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확실히 도표나 통계는 아직도 어렵지만, 적어도 오늘날에는 노동계급의 중요하지 않다고 씨부리는 헛된 망상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어 그 의미가 남달랐다. 특히 프레카리아트론 비판과 마지막의 사회 변혁의 주체는 누구인가를 다룬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학술이 아닌 혁명의 목적으로 쓰인 이 책을 두고두고 읽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