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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의 재림

-삼성전자 노동자 방사선 피폭 사태와 한국 노동 문학

by 꿈꾸는 곰돌이

프로메테우스의 재림

-삼성전자 노동자 방사선 피폭 사태와 한국 노동 문학

반복되는 노동자의 비극과 문학의 산업재해 재현


2024년 5월 27일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노동자 2명이 방사선에 피폭되는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21세기에, 그것도 초일류 기업인 삼성전자에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의 손이 공개되자 대중들은 경악했다. 사고로 인해 연간 방사선 노출 허용 기준치보다 188배, 56배 많은 방사선에 피폭되어 차마 묘사하기 끔찍한 수준으로 피폭되었다. 안타깝게도 심지어 한 노동자는 손가락을 절단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아직 분노를 다 방출하기에는 이르다. 삼성은 늑장 대처했을 뿐 아니라 제대로 된 보상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공개된 삼성 내부의 초기보고서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사고의 책임을 떠넘기려 한 정황이 폭로되었다.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에 따르면 사측은 피해 보상 및 치료 지원 약속 또한 지켜지지 않았다. 사고 이후 피해자가 이상증상을 사측에 보고하고 원자력병원 이송을 요청했지만 삼성은 다른 병원을 권하여 그곳으로 갔으나, 그 병원에는 방사선을 진단할 사람이 없었고 결국 원자력병원으로 이동해 검사를 받아 방사선 피폭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노동조합을 통해 폭로된 내용에는 심지어 피해자들에게 사고의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다는 정확도 있었다.

기흥사업장은 어떤 곳인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사망한 고 황유미씨가 생전 근무했던 곳이다. 당시도 고 황유미씨와 직업병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흔히 말하는 언론플레이를 했다. 이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단체인 ‘반올림’이 만들어졌고, 무노조 경영 신화를 미덕으로 여기던 삼성에도 노동조합이 생겼다. 게다가 올해에는 역사적인 반도체 분야 첫 파업으로 노동자들의 단결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은 고 황유미씨의 죽음 이후에도 사측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안전 관리 미비로 노동자의 손가락이 절단되는 비극이 벌어졌음에도 노동자를 기계 부품처럼 취집하는 기업이 바로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자랑인 삼성이다. 여전히 노동자를 단지 부품으로 취급하는 삼성, 그리고 그런 삼성을 숭배하는 언론과 기성 정치인들을 보면 궁극적으로 참을 수 없는 체제의 부조리함을 다시금 새기게 된다.

이번 뼈아픈 참사를 두고, 두 명의 문인의 작품이 떠올랐다. 두 사람 모두 사고로 인해 손이 절단되는 노동자의 비극을 그린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황석영과 박노해/ 소설과 시의 영역에서 이 둘은 노동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우뚝 솟은 존재이다. 둘은 단지 몽상을 통해 글을 써내는 글쟁이가 아니라, 현장에서 노동하며 느낀 그 소외를 예술로 승화시킨 노동자였다. 특히 예술을 현실과 무관한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고, 현실에 특수한 반영으로 보는 리얼리스트이자 실천하는 사회 운동가였다. 물론 이 둘이 작품을 써낸 70년대, 80년대와 달리 지금 이 두 거인의 작품에는 노동 문학의 색채는 옅어졌다. 그러나 이 둘의 초기작이자, 한국 노동 문학의 성채를 지은 <객지>와 <노동의 새벽>은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불멸의 문학으로 기억될 것이다.

2. 소설이 발화한 노동자의 손가락 절단 비극

노동자에게 손가락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단지 부모님이 물려준 소중히 여겨야 할 신체가 아니다. 슬프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아가 가족 전체를 먹여 살리는 사물화된 도구이다. 손가락이 붙어 있어야 착취당할 존재로서의 가치가 높아진다. 경공업이든, 중공업이든 신체가 온전해야 노동할 수 있다. 그렇기에 손가락 절단은 노동자에게 단지 고통만의 문제가 아닌 실존적 위협이다. 한국 리얼리즘 문학, 그것도 노동 리얼리즘 문학의 시초이자 정점에서 선 황석영의 <돼지꿈>과 박노해의 <손무덤> 모두 손가락이 절단된 인물이 등장한다.

<돼지꿈>은 새마을운동의 그림자에서 허우적거리는 도시 빈민들의 삶을 그려낸 리얼리즘작품이다. 소외된 도시 빈민의 운수 좋은 날을 다룬 다는 점에서, 같은 리얼리즘의 선구적 소설인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비교할 수 있겠다. <운수 좋은 날>이 철저한 비관으로 끝나지만, 강씨네 가족은 비관적인 상황에서 일말의 희망으로 낙관하고, 현실의 삶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비관적이기만 리얼리즘과는 결을 달리한다.

강씨는 노동계급에 편입되지 못한, 사실상 룸펜 프롤레탈리아라고 할 수 있는 넝마주이다. 단지 고물상이 아니라, 절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을 하며 힘겹게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던 중 운 좋게도 멧돼지처럼 거대한 셰퍼드 시체를 도로에서 발견한다. 개를 묻어달라는 부탁으로 하루 일당치에 해당하는 수고비를 받고 개를 끌고 와 몸보신할 생각에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니 집을 나간 의붓딸 미순이 임신한 채로 돌아와 있었다. 혼례를 올려야 하나 돈이 없어 고민을 하던 찰나, 마침 술에 취한 의붓아들 근호가 돌아온다. 일하다가 손가락 세 마디가 절단되는 사고를 겪었는데, 손가락 세 개 값으로 삼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손가락을 잃었다는 슬픔도 잠시 아버지가 가져온 개고기를 먹으러 간다. 오랜 만에 모인 가족은 경사가 났다며 기뻐한다. 철거 위기에 처한 집이 철거 안 되고, 미순이는 시집가고, 오랜만에 개고기를 먹으며 몸보신도 하니 경사라는 것이다. 마치 ‘돼지꿈’을 꾼 듯 잔치를 벌이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흥겹게들 술에 취한다.

<돼지꿈>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비관적으로 읽기다. 비관적으로 읽는다면 비극인 일상에서는 슬픔과 기쁨을 구분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소설로 볼 수 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일명 ‘소확행’을 누리는 빈민들을 통해, 소확행 이상을 꿈꿀 수 없는 불행한 빈민들의 설움을 고발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소외의 괴로움을 소설 속 인물들은 술로, 종교로, 가족에 의지해 살아간다. 소확행을 누리라는 점이, 얼마나 가혹하고 위선적임을 폭로하고 있다. 특히 근호는 손가락이 잘려 앞으로의 생활보다는 단지 삼만원이라는 거금과 주워온 개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쁨이 더욱 값지기에 돼지꿈을 꾼 것처럼 잔치를 즐긴다. 그래서 마치 카뮈가 말하는 <시지프 신화> 속 시시포스의 즐거움을 두고, 노동 현장에서 직접 막노동을 경험한 황석영은 이를 반박하며 ‘돼지꿈’으로 표현했다고 읽힌다.

이와 달리, 긍정적으로 읽는다면 민중 간의 연대의식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공장 노동자, 임신해 집에 돌아온 미순, 부랑민 강씨 등 작품 속 인물들은 전부 불우한 상황에 놓여있다. 특히 이들 모두 언제 집이 철거될지 모르는 위협에 처해있는데, 그렇다고 비관에 빠져 서로에 대한 경멸과 혐오를 늘어놓기보다 가족, 그리고 소외된 이웃이라는 공동체를 이뤄 서로 연대한다. 이러한 작중 인물들은 황석영의 또 다른 소설 <한씨 연대기>의 한영덕과 달리, 집단적 인물로서의 ‘문제적 개인’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제적 개인은 비극적 인물로서의 문제적 개인을 그리는 <한씨 연대기>의 한영덕, 민중과 지식의 통합채로서의 문제적 개인을 그리는 <객지>의 대위와 동혁의 결합체와 달리 민중 계층에 속하는 인물들 모두가 집단적 문제적 개인이다. 이러한 민중 집단을 문제적 개인으로서 묘사하는 <돼지꿈>은 문제적 개인의 고질적 한계인 ‘영웅주의’를 극복하고, 민중을 소설의 주체로 삼는 민중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낙관적으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얻어갈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메시지는 연대하는 민중의 인류애적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보통 이 소설은 낙관적으로 많이 읽히지만, 낙관적으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낙관과 비관이라는 양가적 시선으로 봐야만 희망을 잃지 않더라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돼지꿈 따위나 꾸게 만드는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낙관적으로, 휴머니즘적 연대의 관점에서 읽혀온 <돼지꿈>을 비관적인 시선에서 보면서 양가적인 관점에서 비평한다면, 궁극적으로 황석영은 소설가로서 민중들이 꾸고 있는 악몽에서 깨어나도록 고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악몽을 꾸고 있는,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대중을 각성시킬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벤야민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일종의 꿈으로 보았다. 특히 벤야민은 부르주아도 꿈을 꾸나, 오직 노동 계급만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꿈에서 깨는 방법이란 마르크스주의가 그토록 강조하는 노동 계급의 주체적인 투쟁이다. 황석영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로 투쟁을 보여줌으로써, 즉자적인 계급이 투쟁을 통해 대자적 계급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내용은 <돼지꿈>에는 없지만, 본 작이 수록된 첫 소설집의 표제작 <객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혹한 착취를 당하며 비인간적인 삶을 사는 인부들이 자발적으로 투쟁을 조직해 사측과 싸운다. 비록 승리는 멀지만 “꼭 내일이 아니라도 좋다”라는 말로써 희망을, 그리고 계급 각성의 전략을 제시함으로써 한국형 노동 리얼리즘의 성채를 완성한다. 권오룡 평론가의 <황석영론>의 일부를 빌리자면, 그 리얼리즘의 성채는 황석영 개인의 체험과 문학적 상상력이 조화되어 실천적인 힘을 사람들에게 제공해준다.

3. 시가 발화한 손 절단의 비극


박노해 시인의 전설적인 시집 <노동의 새벽>을 무엇이라고 할까. 당시 시대를 경험한 적 없는 내가 이 시집을 칭송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이 시집에 담긴 시가 시 이상의 가치를 지녔고, 시집으로서 현대사 불멸의 고전임은 확언할 수 있다. 적어도 노동 해방의 새벽이 올 때까지, 이 시집은 불멸의 고전으로 남을 것이며 남아야 할 것이다.

황석영의 단편 소설집 <객지>가 박정희 정부 시절, 더 정확히는 제3공화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노동의 새벽>은 제4공화국 말에서. 제5공화국 시대를 다루고 있다. 물론, 이 시대의 자본축적의 속도는 조금은 차이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무자비한 자본축적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두환이 쿠데타로 집권한 후에도 여전히 선진 자본주의 대열에는 들지 못했다. 청와대의 주인은 변해도,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 착취와 열악한 노동조건은 변하지 않았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미화되는 한국 자본주의 급성장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조명하고 있다. 황석영처럼 직접, 아니 노동자 출신의 문인 황석영과 달리, 정말로 노동자 시인이 되어 그들의 언어로 시를 써냈다. 물론, 이전에도 한국 리얼리즘 시의 지평을 연 신경림의 <농무>와 같은 시들이 있었지만, 단지 시인으로서 타자인 소외된 민중을 재현하는데 그쳤다는 한계 역시 있었다. 그 외에도 시에서 지사로서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김남주나 김지하 같은 전투적 시인들도 있었지만, 노동 계급의 구성원이 아닌 진보적 지식인의 시선에서 시를 썼다. 즉, 사회의 핵심적인 피억압 계급이자 유일하게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세력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존재를 총체적으로 다룬 시는 없었다.

그러나 박노해의 경우 노동자 자신이 직접 자신과 계급의 설움을,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비명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회의 근본적 부조리를 분쇄하겠다는 의지를 시로 표현해냈다. 얼굴도, 본명도 알려지지 않은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꿈꾸는 어느 노동자가 쓴 시는 한국 노동 시의 탄생을 알렸다. 금서임에도 100만부 가까이 팔렸고 대학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읽히며, 그렇게 어느 노동자가 노동의 새벽이 올 때까지 싸우겠다는 출사표는 이내 전설이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처절하게 노동자의 비애를 다룬 시는 <손무덤>이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중략)

내 품속의 정형 손은

싸늘히 식어 푸르뎅뎅하고

우리는 손을 소주에 씻어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략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싸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손무덤’ 중


시는 동료 노동자 정형의 손이 절단된 참상을 다루고 있다. 끔찍한 사고가 나도 바로 노동자를 병원에 이송해주지 않는다. 공장장의 로얄살롱도, 부장의 스텔라도 아닌 타이칸의 짐칸에 실려 병원에 간다. 당연히 엠뷸런스는 꿈꿀 수도 없던 시대의 비극이었다. 오늘날 삼성전자 방사선 사고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원자력 병원에 이송해주지 않고 시간을 끌고, 책임을 은폐하느라 늦었다. 정형이 실려가고 남은 현장에서 동료들은 잘린 손을 꺼낸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 팔딱거리는 손,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침묵하게 된다. 비닐봉지에 넣고 가족에게 돌려주려 했지만 가족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 차마 돌려주지도 못하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온다. 노동자의 성수인 ‘소주’로 손을 씻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에 묻는다. 그들이 묻는 것은 동료의 절단된 손뿐 아니다. 번영의 조국을 향략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고 말한다. 즉, 산업재해의 현장에서 생긴 계급적 분노를, 비애를 시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거나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이 점이 전체적으로 허무주의의 향기, 목가적 분위기가 그윽한 90년대 원의 시학과 구분되는 예리한 각의 시학으로서의 특징이다. 70년대 민중문학의 연장선에 있는 노동문학의 정수를 담은 작품이다. 그래서 컴컴한 시대라도 별빛이 보이는 시대였기에, 민중간의 연대로 별을 이어 가야할 길을 비추던 시대였기에 한 줌의 낙관을 찾아볼 수 있다.

40년전 세상에 나온 이 시집에 담긴 슬픈 손무덤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일류 기업의 노동자마저 방사선 누출로 손을 절단해야 하는 시대에 노동의 새벽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늦장 대응에 이어 책임 회피하는 사측의 파렴치한 태도를 보면,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금 새기며 언약을 삼킨다. 노동 해방의 그 날, 저들의 손을 잘라 노동자의 영전에 받치리라.

4. 불이 꺼진 자리에는 연기만 그윽할 뿐

한국의 80년대는 불의 시대였다. 그중에서도 극단적으로 살아있는 불이었다. 2008년, 2016년 광장을 메운 고요한 촛불도, 그마저도 흩어진 문재인 정부 이후 반딧불도 아닌 진실로 깊게 타오르는 횃불, 스스로 파멸되며 그 존재를 증명하는 화염병의 불이었다. 그 불은 인류에게 불을 선사한 프로메테우스의 불과도 닮아있다. 대학은 데모의 무대가 되었고, 한국에서는 마르크스, 레닌, 루카치와 같은 혁명적 사상가들의 책이 읽혔다. 문인과 지식인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앞서 다룬 황석영과 박노해 외에도 2500만 노동자 전체를 민중혁명의 가장 중요한 잠재적 에너지로 규정한 1980년대 후반 소설들과 신경림의 『농무』 이후 한국에 뿌리내린 투사들의 시는 한국 리얼리즘의 성채를 더욱 견고히 했다. 소설로서는 방현석, 정화진, 홍희담 등이 있고, 시로서는 김남주와 김지하로 대표되는 각의 시학의 대가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노동 시의 계보를 써내려간 백무산과 박영근, 훗날 송경동이 있다. 그중에서도 황석영의 소설과 박노해의 시를 다룬 것은 가장 정점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흐름의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시문학을 두고 생명주의와 허무주의에 젖줄을 댄 축제/구도/유희/투시의 네 경향이 복합적으로 짜여진 작물이라는 남진우 시인의 말대로, 한국 시문학은 급진성과 민중성을 잃어갔다. 80년대 각의 시학이 갈등과 투쟁을 주제로 한 아니무스의 시학이었다면, 원의 시학은 사랑과 조화를 지향하는 아니마의 시학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유하, 오징어 전문

빛나는 불꽃에 열광하던 민중문학과 달리, 90년대 물질 자본주의의 쾌락과 허무를 포착한 유하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는 빛나는 ‘모오든 광명’을 의심할 것을 말한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의심은 자본주의의 허무한 빛에 대한 의심뿐 아니라, 타오르던 급진적 홍염에 대한 회의도 포함한다고 읽힌다. 이때 이후 많은 시인들은 민중의 홍염이든, 자본주의의 인위적 조명이든 모든 것을 의심하며 생명주의와 허무주의의 숲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젊은 시인들을 총칭하는 ‘미래파’로 불리는 이 시인도 그 숲에 몽환성과 환상성을 가미할 뿐, 숲에서 나와 광장으로 향해 있지는 않다. 물론, 이 말이 곧 사회를 묵인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숲에서 광장을 조망할 뿐, 광장에 서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다시 광장에 모여야 한다.

90년대 이후 소설에도 마찬가지로 허무주의가 깊게 유입되었다. 특히 하루키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많아졌다. 단순한 재현에 그치는 작가들부터 한국적 변주를 적절히 이룬 작가들까지 많으나, 하루키와 함께 한 90년대 소설가들은 오르페우스와 닮아있다. 김현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오르페우스는 노동을 평화롭게 종결시키며,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과 신-자연을 통합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오르페우스적 소설들은 결국은 계급투쟁을 지향했던 80년대 소설이 보여준 급진성 없이 억압 없는 문화를 꿈꾸는 목가에 가깝다. 물론, 김영하처럼 급진적 허무주의를 보여준 이들도 있지만, 결국은 세계가 이미 몰락한 폐허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멜랑꼴리한 인물들은 댄디즘에 취해 낭만적 탈자본주의의 개인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즉, 90년대 이후 한국 소설 속 인물들은 날카로움 없이 현실에서 멜랑꼴리를 벗삼아 안주할 뿐이다. 2010년대에 들어서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작품 세계가 변한 이들도 있고, 이 과정에 페미니즘과 퀴어가 주요한 담론이 되었다. 물론, 반가운 일이다. 김현 선생의 말대로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기도 해야 하나, 더 나아가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 줘야 한다. 그러나 차별만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말고 차별을 잉태하는 착취로 굴러가는 사회의 총체적 부조리에 대해 도전해야 한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이 차별에 대해 전위적으로 도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지만, 착취의 편린이라 할 수 있는 차별에만 반대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착취의 원인을 고발하고 그 착취로 신음하는 피억압자들의 편에 서야 한다.


5. 노동문학 리부트, 프로메테우스의 귀환을 위하여

프랑스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명저 <반딧불의 잔존>은 비관의 철학자들이 득세한 시대, 한 줌의 희망을 준다. 반딧불은 결코 소멸하지 않았으며 어디에나, 언제라도 잔존해있다고. 이는 한국 비관이 가득한 한국 사회에도 적용된다. 변혁보다 개혁을, 민중보다 시민을, 화염병보다 촛불을 선호하는 시대라 해도 반딧불이라는 변혁적 주체의 대자적 계급 의식은 잔존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두고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체제라고 봤다.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려면 착취를 해야 하고, 착취해야 할 대상인 노동계급도 형성되기 때문이다. 노동 계급은 사회를 주체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인류 역사상 유일한 피지배계급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투쟁에서 승리해 사회를 주체적으로, 민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인 이윤율 하락 경향으로 인해 점차 위기에 몰리고 있고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의 착취율을 높이려고 한다. 이때 노동계급의 투쟁이 벌어지고 최종적으로 노동계급이 승리한다면 다른 세계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설명이다.

물론, 급진적 운동을 이끌만한 세력이 매우 미약한 것은 사실이다. 민주노총은 개량주의화되었으며, 진보당과 같은 주류 진보 세력은 선거를 통해 민주당과의 연립 정부 구상을 목표로 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투쟁의 주체가 될 노동계급의 투쟁 가능성마저 미약한 것은 아니다. 가시적이지는 않더라도 그 잠재성은 여전하다. 2022년 말에 있던 화물연대 파업과 2023년 건설노조 상경 투쟁 등 부문별 투쟁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특히 올해에도 기업가들의 허울 뿐인 신화에 또 한 번 금이 갔다. 이병철이 살아있을 시절 무노조 경영을 원칙으로 하던 삼성전자에서 노동조합이 파업에 나섰다. 전 세계에서 반도체 파업 부분 첫 파업이라는 기념비적인 행동이었다. 아쉽게도 8월에 파업을 종료했지만, 거대 노조에 의존하지 않은 노조의 기념비적 파업은 분명 계급투쟁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는 강력한 징표이다.

노동계급이 더 이상 사회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는 가이 스탠딩의 프레카리아트론과 네그리의 다중 등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폄훼하는 여러 사이비 이론들이 과잉되어 있지만, 노동계급은 여전히 건재하는 것을 넘어 양적으로, 질적으로 더욱 성장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노동계급을 분석한 책에 따르면, 1990년대 말 이후 ‘탈산업화론’이 일종의 상식처럼 퍼졌고,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산업이 이동하면서 노동이 거대하게 변했다고 흔히들 말한다. 하지만 제조업 고용의 감소와 제조업 자체의 쇠퇴를 혼동하면 안 된다. 국내총생산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증가했다. 그러니 노동계급의 현실을 조명하고, 노동계급을 억압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고발하는 노동 문학을 말하는 것은 전혀 오래된 것이 아니다. 노동문학이 그렇다고 해서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비롯한 사이비 사회주의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의 의식이 불균등하기에,대자적 계급의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문학적 주춧돌이라고 하고 싶다. 억압받는 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주목하고, 억압의 주체와 투쟁의 주체를 주목해 문학적으로 채색하는 것이라 하고 싶다.

이렇다 할 구체적 가이드 라인을 제시하기에는 필자의 미약한 글 짓는 능력을 초과하는 일이라 생각된다. 단지 가야할 길을 제시하기보다 우리가 올바르게 걸어왔던 길을 되집어 작업이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김수영, 김남주, 박노해, 백무산, 송경동이 걸어갔던 각의 시학의 길. 황석영과 방현석이라는 두 거인이 발자취를 남긴 노동 소설의 길. 오히려 노동 문학이 캄캄할수록 옛날에 보았던 그 성좌들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에서는 최지인의 MZ세대에서 포착되는 젊은 세대의 급진성을, 소설에서는 황정은이 말하는 21세기의 혁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색채가 뚜렷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작품에서는 새로운 노동문학의 맹아를 찾을 수 있다. 이 두 작업이 동시에 수행되어야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눈을 뜨고 앞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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