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불가한 청춘에 대한 향수
바람에 날려 꽃이 지는 계절엔
아직도 너의 손을 잡은 듯 그런 듯 해
그때는 아직 꽃이 아름다운 걸
지금처럼 사무치게 알지 못했어
우~ 너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네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그날의 바다는 퍽 다정했었지
아직도 나의 손에 잡힐 듯 그런 듯 해
부서지는 햇살 속에 너와 내가 있어
가슴 시리도록 행복한 꿈을 꾸었지
우~ 그날의 노래가
바람에 실려 오네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지난날의 너와 나
너의 목소리도 너의 눈동자도
애틋하던 너의 체온마저도
기억해내면 할수록 멀어져 가는데
흩어지는 널 붙잡을 수 없어
바람에 날려 꽃이 지는 계절엔
아직도 너의 손을 잡은 듯 그런 듯 해
그때는 아직 네가 아름다운 걸
지금처럼 사무치게 알지 못했어
우~ 너의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네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우~ 그날의 노래가
바람에 실려 오네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지난날의 너와 나
우~ 영원할 줄 알았던
스물다섯 스물하나
스물다섯 스물하나
과거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결정적 이유는 그 시절로 회귀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사람에게 유일하게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흘러간 시간일 것이다. 계급도, 인종도, 젠더도 초월하는 보낸 시간이야 말로 모든 현존재에게 공평하게 흘러갔다. 그렇지만 청춘의 편린을 어떻게 조각하느냐는 저마다 다르다. 물들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가장 순결했던 사랑을 보낸 이도 있겠고, 사랑이 아닌 성적 욕구에 방종하는 청춘도 있을 것이며, 사랑조차 상상할 수 없는 처지에서 비참하게 시간을 허비한 이도 있을 것이다. 모범적으로 제시되는 바람직한 청춘의 이미지는 풋풋한 대학생 커플로서 보내는 순순한 사랑일 것이다. 성인이 되어 겪을 사랑의 시간 중, 그나마 덜 자본주의의 그림자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지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대한 가장 정석적인 해석은 과거 때묻지 않는 순순한 사랑을 회상이라는 것이다.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그랬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모두 시인이 된다고. 사랑에 빠졌던 시절은 세속에서 성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극히 드문 시간이다. 프랑스 철학자 바타이유는 이것을 에로티즘과 연결했다. 그가 말하는 에로티즘의 세 종류 중, 심정의 에로티즘은 사랑의 열정을 말한다. 연인의 육체뿐 아니라 그 영혼까지 사랑하는 심정의 에로티즘을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세속에서도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시인이 된다. 그 성스러운 힘을 통해 사랑했던 너의 향기를 바람에서 맡을 수 있고, 그날의 노래를 바람에서 들을 수 있다. 지나간 과거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황홀하게 소중하기 때문에 그 시간에 느꼈던 너의 목소리도, 너의 눈동자도. 애틋하던 너의 체온마저도 모조리 회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손에 쥐면 녹아버리는 눈덩이처럼, 너를 계속 회상할 수록 자꾸만 기억은 휘발된다. 영원할 줄 알았던 떠나간 사랑을, 잊힌 사랑을 한탄하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는 것이다. 분명 연인과의 사랑과 그 이별에 대한 비애가 주를 이루는 한국 대중가요에 맞춰 해석한다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보다 이 노래를 대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뮤직비디오는 이런 주류적 해석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열어둔다.
아파트 평수, 자동차 배기량, 은행 잔고, 그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노래가 흘러나오기 전에 나래이션이 말한 이 노래는 이 노래를 보다 다채롭게 채색한다. 연인과의 사랑의 범주가 아닌 자신의 청춘에 대한 사랑으로 말이다. 사무직 노동자로서 일상이 된 야근에 시달린 주인공의 환상에 흘러내리는 뜨거웠던 청춘에 대한 회상곡으로 들린다. '나'는 현재 노동의 소외로 괴로워하는 나이고, '너'는 과거의 연인이 아닌 과거의 나로, 과거를 회상하면 할 수록 희미해져가는 슬픔과 회귀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한탄으로 들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물 하나와 스물 다섯은 연인과 나의 나이차가 아니라, 과거 스물 하나의 나와 스물 다섯의 나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할 듯 하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바람은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가장 애틋했던, 가장 다채로웠던 시기가 아닐까 싶다.
현재 청춘의 편린을 그닥 무게감 없이 흘러보내고 있는 나에게 이 노래는 아직 푼크툼은 아니다. 그러나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과 상실을 경험했거나 언젠가 먼 훗날 청춘의 순수함과 푸른 생기를 소진하고 나서 다시 이 노래를 듣는다면, 이 노래가 찔러올 날카로움에 견딜 수 없이 힘들것 같다. 지나간 과거의 연인의 초상, 림, 혹은 지나간 과거의 자화상이든 그 자체가 성스럽고 기억되는 이유는 지금은 지금은 도저히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우림의 애절한 목소리는 이런 향수를 극대화하여 한참 청춘을 즐기고 있는 나에게도 청춘 상실을 선험하도록 한다. 21세기의 음유시인 중 가장 마력적인 힘을 지닌 여자 가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