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남성성이라는 은어에 속지 말기
9.17 독서일기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은어에 속지 말기
박상수 평론가의 두 번째 평론집《너의 수만가지 이름을 불러줄게》에 수록된 글들은 대체로 사랑스럽다. 사랑의 층위를 건드리는 글들에는 텍스트를 감싸는 애틋함이 느껴지고, 그렇기에 당연히 감미롭게 읽힌다. 그중 온전히 몰입하게 되어 평론속으로 들어가 평론가와 대결하도록 몰입의 경지에 닿은 글이 있다. 2부 마지막을 장식한 <다른 남성성들을 위하여>라는 글이다. 문학평론가라고 해서 사회적 담론들을 건드리지 않고 침묵하는 행위는 기만적인데, 박상수 평론가는 문학인으로서 한국 사회와 문단을 뒤흔든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에 접근한다. 박상수는 한국 사회에 자리잡은 고질적 병폐로 식민지 남성성을 비판한다. 여기서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학자 권김현영과 정희진의 글을 빌려 정의한다. 권김현영은 한국 남자들은 이상할 정드로 남자다움에 집착한다고 말한다. 또한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민 남성은 일본인 남성에 대해 권력에서 밀리다, 식민지 남성으로서 스스로를 '결핍=여성=피해자'로 연결하면서 자기 연민과 혐오에 시달리며, 스스로를'여자만도 못한 존재'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문제는 자신의 취약한 남성성을 재확인하면서 여성을 한 번 더 비하하며 '이중의 여성 비하 구조'에 빠진다고 말한다. 글이 말미에서는 박상수 평론가는 이제 남성 문인들이 오랜 식민지 남성성 자기 비하의 나르시시즘적 내러티브를 끝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여성을 마녀나 성적 대상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자 동료로서 대하는 일에서 시닥한다고 말한다.
식민지 남성성과의 결별을 주장하는,박상수 평론가의 입장은 당연히 지지할 만하다. 문학이란 업압의 근원을 추문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여성 차별과 비하적 풍조에 대해서 문인으로서 반대하는 일은 당연하고 정의롭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여성차별과 비하 풍조가 멤도는 것의 원인은 남성성도, 식민지 남성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그 개념부터 형성되지 않는다.
우리 페미니즘 동지들은 여성 차별에 반대한다면서, 그 논의 자체가 성차별적인 남성성-여성성 논의를 그토록 좋아하는지 의문이다. 조금 강하게 말한다면,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해로운 남성성에 대한 여성성의 수호자로서 비롯된 이익이기 때문일까?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성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달리, 여성성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평화로움과 감성적으로 대표되는 둥근 여성성과 폭력적 성격과 이성적으로 대표되는 날카로운 남성성은 실재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강조하겠다. 여성과 남성은 다른 신체 기능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성차는 있다. 그런데 이런 차이 이상의 성차가 존재한다는 관념은 모조리 허구이다. 남녀의 차이를 과장해 여성의 신체가 더 열등하다거나, 여성과 남성이 심리적으로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구실이 달라야 한다는 것의 논의의 연장선이 남성성-여성성 논리이다. 진정으로 여성 해방을 염원하는 입장에서 남성성/여성성 논의는 부디 종식되어야할 허수아비의 오류이다. 식민지 남성성 또한 기묘한 궤변이다. 현존하는 여성차별의 궁극적 해결은 해로운 남성성의 극복이 아닌, 해로운 자본주의 체제 극복에 있다.
문학은 있지도 않은 해로운 남성성의 고발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만성을 고발해야 한다. 인간을 허구적 관념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 단디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