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섹스를 해야한다
자위하는 문학과 섹스하는 문학
신형철 평론가의 <몰락의 에키가> 중 가장 매료되는 글이라면 이미 한 글자 단위로 잔상이 남은 서문이겠지만, 평론이 아니라 출사표이기에 논외로 한다면 <시는 섹스를 한다>라고 할 수 있다. 정상위, 후배위, 체위 등 한국 시에 등장하는 여러 섹스 체위를 통해 한국 현대 시의 변모과정을 탐색하는 놀라운 글이다. 그 글과는 별연관은 없지만, 오늘날의 문학은 섹스를 한다. 아니, 해야 한다. 단지 섹스가 연인과의 성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은유적 표현이다.
사회 운동의 층위에서 흔히 이론과 실천을 통일하라고 한다. '이론과 실천'의 통일은 모든 사회 운동가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학문이 아닌 운동의 영역에서 존재하려면, 이 둘의 통일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렇나 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민중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서의 퇴화히고, 급진주의는 개혁주의로 퇴락하며 이 둘은 융합되지 않은 채 이론은 이론대로, 통일된 실천은 없거나 목가적 노마드로 개별화되었다. 즉, 이론은 지식에 한정되었고, 그 지식은 현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폐적 개인의 앎의 유희에 국한되어 있다. 한 마디로 현실이라는 타자와의 관계 맺기가 아닌, 개인의 지적 쾌락을 위해 지식이 갇혀있고, 공부되는 현상을 두고 지식의 자기위로화라고 하고 싶다. 앎에 대한 욕구로 인해 홀린 듯이 책을 읽는 행위는 자위행위이다. 자신의 쾌락을 충족하기 위해 리비도를 낭비하는 것이기에, 이는 분명 지적 자위에 불과하다. 책을 읽고 간단한 감상평을 쓰거나 잡담을 하고, 다시 책을 읽는 무한의 과정.... 지겨운 자위 행위이이다. 자위는 편하다. 내게는 지옥인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섹스에 준하는 원초적 쾌락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갈증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결국 갈증을 느끼며 또 다른 건조한 자위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렇다면 이론은 어떻게 섹스를 할 수 있는가? 이론이 실천의 층위에 맞닿았을 때, 그것을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연인 간의 스킨십에 해당할 것이고, 이론과 실천이 서로 융합되면서 이론이 실천에게로, 실천이 이론에게로 서로 애무한다. 그러다 이론으로 실천에 정점을 찍고, 실천으로 이론에 교훈을 남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은밀한 이론과 실천의 섹스이다. 무궁무진한 체위로 섹스를 하면서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섹스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어떠한가? 리얼리즘, 그것도 한국식 노동 리얼리즘 바람의 바람이 떠난 곳을 대체한 니힐리즘의 망령 문학 작품 속 주체에게 섹스를 추구하는 문학으로 현실에 다가가는 전통과 달리, 현실을 관음하며 단지 자위할 뿐이다. 현실은 더럽고 타락했으니, 결국은 문학이란 이론으로 자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위는 또 다른 자위를 낳을 뿐더러, 건강하지도 않다. 타락한 세계를 변화시킬 혁명적 리비도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직 무의미하게 배출되는 것이다.
문학은 자페적 발화가 아니다. 문학은 분명 타자인 현실과의 섹스를 해야 한다. 현실이 만들어낸 타락을 보고 자위하는 것은 비겁한 대상화일 뿐이다. 문학은 섹스를 해야 한다. 더 이상의 자위는, 몰락하는 세게에 대한 방관이다. 현실을 반영하는, 그것으로 대상화하여 우울 포르노를 양산하면 안 된다. 문학이여, 우울이 아닌 격정의 섹스를 하자. 현실과의 격정적인 섹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