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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사라진 평론가, 깊게 맺힌 사유들, 김현 선생

9.27 독서일기

by 꿈꾸는 곰돌이

이젠 사라진 평론가, 깊게 맺힌 사유들

-김현 『사라짐, 맺힘』


문학 비평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음 속 한 구석에 파고든 깊은 이름이 있다면, 감히 김현 선생을 말하고 싶다. 김현이라는 따듯한 칼날을 머금은 존함은, 적어도 내 또래 되는 문학도에게는 평론가의 이름보다 동명의 시인으로 익숙할 것이다. 내가 문학도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은 김현을 일찍이 접할 수 있엇던 것이라 단언한다. 시수업 시간에 김현 선생의 『행복의 시학』을 발제하며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을 다룬 김현 선생의 섬세한 사유를 느낄 수 있었고, 금세 김현문학 세계에 매료되어 선생이 남긴 저작들을 읽어가고 있다. 이미 절판되어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은 극히 드물다는 아쉬움이 있다. 지역 도서관에도 선생의 저작은 거의 없다. 다행히도 대학 도서관에 김현문학전집이 있어 조심스레 빌려와 읽을 수 있다. 단행본은 도서관에조차 없어 사후 출판된 김현문학전집을 읽는데, 내가 읽어본 김현 선생의 저작들은 다음과 같다.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적 연구 성과와 상상력을 분석한 책인 『행복의 시학』, 생애 마지막 순간에 남긴 푸코 연구서 『시칠리아의 암소』, 80년대 정점에 있는 시인들의 평론집인 『분석과 해석』, 선생이 남긴 문학테제이자 내 마음 속의 경전으로 자리 잡은 『한국 현대 문학의 위상』, 그리고 스스로를 ‘문청’으로 거듭나게 해준 『행복한 책읽기』가 있다. 이중 『행복한 책읽기』 외에는 거의 다 절판된 상태인데, 그나마 위안을 삼자면 근간에 선생의 작업을 글을 몇 개 모은 『사라짐, 맺힘』이 있다. 표지만 보고는 시인 김현이나 동명이인이 쓴 산문집처럼 보이나, 문학과지성사의 새 산문 시리즈인 문지 에크리로 새롭게 발간된 김현 선생의 평론집이다.

책 끝에 실린, 이 책을 엮은 이광호 평론가가 쓴 글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김현 비평은 수정의 메아리로 불리는 텍스트의 떨림을 읽는 실제 비평과 사유하는 문학사적 통찰에 있지만, 이와 달리 ‘글쓰기’는 틀에 갇혀있지 않고 다양한 영역으로 뻗어 나간다는 것이다. 특히 김현의 산문은 “아도르노가 말한 사물과 분리된 언어의 빈곤을 극복하는 글쓰기, 개념이 배제한 것들을 주변에 모아 사물에 대한 보다 풍부하고 생생한 서술이 될 수 있도록 한다는 에세이 형식에 부합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난파인의 글쓰기, 갇혀있음을 알고, 그가 그토록 열고 들어가려는 세계가 공허와 무의 세계임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 자, 그 공허한 행위의 또 다른 의미를 탐색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김현 선생의 비평을 제외한 산문들을 제재별로 뽑아 구성되어 있다. 사라짐을 견디는 맺힘이 있으며, 공허를 사유하는 공허가 있다고 말한다. 당연히 ‘비평’을 기대하고 읽은 나에게는 다소 아쉬웠지만, 사랑에는 형식이 중요하지 않듯, 김현의 글이라면 온전히 사랑으로 읽어냈다.


목가적 영혼과 글

선생의 글은 늘 진솔하다. 화려한 베일을 갖추어 자신을 수려하게 치장하는 평론가가 아니라, (수사보다 정확성을 추구하는, 지식으로 자위하지 않는) 담백한 문체에 기대어 자신의 영혼의 있는 그대로를-추함이든, 아름다움이든- 적어내는 공감의 비평가이다. 그런 글은 유목민이 적은 목가로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비평에서도 그런 소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더욱 자유로운 형식이 선생의 목가적 영혼을 잘 담아내는 것 같다.

몸에 대해서 고백하는 글인 <몸 이야기>에서는 삼십대 후반 몇 년 동안 매일 술을 마셨다며, 그것도 안주도 없이, 함께 줄담배를 태웠다고 한다. 다음 날 다시 고통스럽지만 정신을 차리면 다시 술을 먹을 시간이 다가온다며 그 즐거운 지옥에서 몇 년을 보내고 난 뒤, 폐허가 된 몸을 직시하고 술을 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전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한국의 풍경을 보았다며 기뻐한다.

아파트에 살며 느낀 아파트 병을 담은 <두꺼운 삶과 얇은 삶>은 현대 자본주의 도시에 우울을 느꼈던 그 시절 보들레르처럼, 더 큰 평수를 갈망하는 아파트 생활에 영혼의 결핍을 느끼고 땅집의 아름다움에 대해 예찬한다. “현실 생활의 일상성에 길든 정신에게는 그 편안함처럼 불편한 것이 없을 것이다. 진짜 도피는 편안한 것을 불편하게 느끼는 정신이다.”라고 말하는 마지막 문장은 90년대의 초로에 쓰였지만, 긍정성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가슴에 새겨야 할 명문으로 다가온다.


단문의 단아함

선생은 스스로 바슐라르라 말하는 아르파공 콤플렉스에 걸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찮은 것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간직하려는 인간의 심리적 복합체라고 하는데, 선생은 단상마저 버리지 못하고 촘촘히 문장으로 적어낸다. 그 밀도가 놀랍다. 카프카처럼 글쓰기 중독증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 세세함과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단문은 훗날 『행복한 책읽기』에서 보여준 독서일기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50년 전 쓰여진 이 단문은 당대 유럽 도시의 기행 메모인데, 심각하게 솔직한 문장(에로 영화나 춤을 보면 아랫배가 아프다. 도발된 성욕이 배에다 발길질을 하는 것이다)과 아포리즘으로 다가오는 유럽에서의 깊은 사유가 느껴진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일이 그렇게 되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때, 우리는 기다리지 않는다)

한편으로 선생의 유럽 기행기를 보며 역시 사람은 책을 읽고 세계에 다가서야 그 심연과 사유의 현란한 충돌을 느낄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다. 반 세기 전, 낯선 동양의 나라에서 왔음에도 그 세계를 마음껏 탐닉한 선생의 당돌함을 느낄 수 있다.


사실 김현이라는 존함은 내게 너무나 아득하고 한편으로는 애달픈 이름이다. 선생이 살았던 시대를 산 적이 없기에 그의 사유와 경험을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난파 공동체에 속해 있는 낯설지만 친숙한 산문으로 다가온다. 정체된 시대에 고독하게 표류하고 있는 같은 난파인으로 결국 사랑을 놓지 않은 선생의 산문에 깊게 매료될 수 있었다. 역시 거인의 비평가가 걸어온 발자취는 아름답다. 거인이 걸은 길 중 비평이 아닌 산문의 길이라도 말이다.

한편 비평으로 접했을 때, 선생은 대단히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명성에 비추어 대단히 권위적일 것 같은 이미지로 남아있었는데, 선생의 산문에서 읽힌 삶은 대중문화와 학생들에게 열려있고, 소박하게 라면을 좋아하며 술과 담배에 기대어 행복한 삶은 향유한 소박한 난파인으로 느껴진다. 당연히 직접 뵌 적 없지만 그리움이 느껴진다. 선생이 남긴 문장으로나마 선생의 발자취를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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