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8 독서일기
단연코 최고의 레닌 입문서
루카치, <레닌>
난놈은 난놈이다. 물론, 이것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한테 쉽게 내뱉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루카치의 책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초기 저작인 <소설의 이론>에서 숨 막히게 아름다웠던 시적인 문장으로, 낭만주의적 반자본주의의 정수를 느낄 수 있었는데(내용 이해와는 별개로)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나온 <역사와 계급의식>에서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계급의식, 변증법, 정통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논했다. (반자본주의적이지만) 우파적 신칸트주의자였던 루카치가 헝가리 혁명을 겪고 어느새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가 되었다는 것을 두고, 역시 사람은 시대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명제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역사와 계급의식> 이후 나온 루카치의 <레닌> (원제는 <레닌: 레닌 사상의 종합에 관한 연구>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레닌의 위치를 마르크스의 옆으로, 혹은 그보다 높게 놓일 수 있도록 텍스트로 담아낸 레닌 연구서이다. 무려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이 책은 충분히 유용할 뿐, (역사적 상황이 많이 변했음에도) 최고의 레닌 입문서라고 할 만하다.
사상가? 사상을 실천에 접목한 철저한 혁명가
우스갯소리로, 사람을 간단히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때 문학 속 인물을 원형으로 하여 햄릿형 인간과 돈키호테형 인간이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분류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지나치게 폭력적인 분류지만, 나는 레닌이 망설임 없이 저돌적으로 행동하는 돈키호테형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소수의 마르크스주의자를 제외하면 사상들 대부분은 평생 생각만 거듭하다 죽는 우유부단한 햄릿형 인간이지만, 레닌은 철저한 돈키호테형 인간이다. 그러니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로 트로츠키, 그람시, 룩셈부르크처럼 독창적인 무언가를 보여 주지 못 했지만, 구체적인 현실에 맞춰 맑스주의 이론의 정수를 변증법적으로 적용했다는 데에 있다. 즉, 보편을 특수에 적용하여 혁명을 이뤄낸 위대한 사유가이자 혁명가라는 것이다.
루카치는 레닌의 가장 큰 무기로 그 유명한 ‘혁명의 현재성’을 이야기한다. 프롤레탈리아 혁명이 막연한 먼 훗날의 과제가 아니라, 실천적 과제라는 것이다. 이는 카우츠키, 그보다 못한 베른슈타인 등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구분되는 레닌만의 특징이자, 나는 여기서 그가 돈키호테형 인간에 속함을 포착할 수 있었다. 혁명의 현재성은 혁명이 수동적 메시아주의와 구분되는, 시대의 모든 문제들을 평가하는 시금석이 되어, “각각의 일상적 문제를 사회역사적 총체와의 구체적연관 속에서 프롤레탈리아 혁명의 계기들로서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대의 문제는 모두 혁명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조직과 전위
레닌에게 조직 문제야말로 진정으로 혁명의 현실성에 대한 영역이면서도, 스탈린주의 독재의 근원으로 여겨져 많이 곡해되고 있는데, 루카치는 레닌의 당 이론에 대해 탁월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루카치는 레닌이 자본주의의 경제적 힘들의 기계적 발전과 대중이 자생적으로 투쟁한다는 낙관론에서 벗어나 혁명적 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당이 의식적 능동성의 산물이라고 보며, 기계론적 숙명론과의 단절을 말한다. 레닌의 당은 대중을 지도하면서도, 대중에게 지도를 받는 상호 지도적 관계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결국 루카치는 스탈린을 비판하면서도 스탈린주의에 투항하는데 (시대적 한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가 적어도 저서에서 포착한 레닌의 당 이론은 레닌주의의 정수를 들어내고 있다.
국가는 지배 계급의 도구
레닌의 국가론은 마르크스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정수를 잘 계승하고 있다. 당시 사회민주주의로 불리는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국가에 대한 이론이 알다시피 처참했고, 레닌의 불후의 저작 <국가와 혁명>을 통해 프롤레탈리아트의 혁명뿐 아니라, 독재를 옹호한다.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투쟁을 취해야 함을 계속 강조하면서도 권력 장악이 즉각적인 사회주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가 노동운동의 직접적인 과제로 떠올랐음을 말한다. 루카치의 총체성으로 본 레닌의 국가론은 말 그대로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레닌을, 그리고 루카치를 읽어야 할 이유이다.
물론, 100년 전 저작이라 오류도 있고 루카치 특유의 학술적, 철학적 용어로 인해 읽기 어려운 면이 있다. 게다가 전설의 운동권 출판사 ‘녹두’에서 출간한 책이라 당연히 절판되었고 더 이상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레닌이라는 거인을 총체적으로 평가한 이 책을 읽을 수만 있다면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레닌도, 이를 풀어낸 루카치도 오류가 있었지만 인류 해방을 위해 헌사한 혁명가와 사상가이기에. 나는 그들을 내 마음 속에 새겨논다. 이 책도 함께.
<첨언>
레닌의 저작 중 <국가와 혁명> 외에는 원전을 읽기가 무척 어렵다. 이것도 그나마 쉬운 저작이기도 하고, ‘돌배게’에서 나온 판은 해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읽을 정도의 수준에 든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도저히 그 상황을 모르고서 무턱대고 읽기가 어렵고, 다른 저작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 책이 사실 레닌 평전을 가장한 러시아 혁명사이기 때문에, 루카치의 <레닌> 및 레닌 평전을 함께 읽어 보자.
202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