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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제임슨을 기억하며, 1934-2024

9.29 독서일기

by 꿈꾸는 곰돌이

프레드릭 제임슨을 기억하며, 1934-2024


지난 일요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프레드릭 제임슨이 세상을 떴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서 가장 창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를 잃은 것이다. 이는 평생을 미국의 엘리트 대학에서 가르친 프랑스 문학 전문가의 단언이지만, 이에 동의할 만하다.


제임슨의 가치는 일찍부터 두드러졌다. 두 번째 저서인 <마르크스주의와 형식> (1971) 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여기서 그는 1960년대 운동으로 급진화된 세대를 '변증적 비판'이라는 전통으로 소개했다.


여기에는 게오르크 루카치, 에른스트 블로흐, 발터 벤야민, 테오도르 아도르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문화 이론가들이 포함되었다.


이 책 말미에서 제임슨은 "문화 작품은 질병의 증상조차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면서 오랫동안 볼 기관을 잃은 총체성의 편린처럼 망각되지 않는 핵심의 징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편린은 비가시적 총체성인 자본주의에서 원래 제자리로 복원하는 것이 변증법적 비평의 과제였다.


제임슨은 '문화'를 매우 폭넓게 이해했다.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JW 괴테, 조지 엘리엇에 대해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탐정 소설과 공상 과학 소설에 대해서도 다뤘다. 그는 올해 초에 출간된 영화와 TV에 대해서도 열심히 보고 논평했으며, 올해 초 출판된 <Invention of a Present>에는 드라마 ‘The wire’도 언급했다.


제임슨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저작인 <정치적 무의식> (1981)에서는 정치적 관점이 (그가 언급한 마르크스주의) 모든 읽기와 해석의 절대적 지평이라고 담대히 주장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역사를 모든 노력의 “부재원인”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물질적 생산의 토대는 계속되지만, 편리하게도 악화되어 간헐적으로, 무시하기 쉬운 상태”로 존재한다.


하지만 “역사는 아픔을 주는 것이며, 욕망을 거부하고 개인 및 집단의 실천에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제임슨은 마르크스주의가 경쟁 이론으로 보이는 것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에 대한 부분적이고 제한된 관점을 제공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통찰력을 이어받아 사회 전체에 대한 이해에 통합한다.


특히 <변증법의 발란스>(2009)에서 그는 미셸 푸코와 같이 마르크스와 대립하는 사상가들의 작업을 훌륭하게 다루고 그들이 제시하는 진리를 통합한다.


아마도 제임슨의 가장 유명한 글인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1984)에서도 동일한 방법이 적용된다. 여기서 그는 앤디 워홀의 그림부터 새로운 기업 건축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문화적 지배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예가 된 다양한 문화 현상을 탐색한다.

이것들은 신자유주의의 승리로 인해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세계화되면서 겪은 변화의 표상으로 보았다. ”“바로 이 전체적으로 놀랍고도 우울하고 사기를 꺾는 독창젇인 새로운 세계적 공간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리의 순간이다”


제임슨은 이 문화적 변화를 비판하거나 비판하기보다 이해하는 것을 강조했다.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 예를 들어 테리 이글턴과 나(캘리니코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는 자본주의를 향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에 대해 제임슨의 헌사를 감소시키지 않는다.


1991년 냉전의 종말로 인해 서구 제국주의의 명백한 승리에도 그는 도전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자본과 노동(그리고 그들의 대립)은 새로운 질서하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며, “마르크스주의라는 단어가 어떤 새로운 암흑 시대의 기록 삭제에서도 사라지든 아니든, 그 자체는 필연적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임슨의 글은 종종 난해했다. 그는 문장의 길이와 복잡성으로 유명했다. 그의 문장을 읽으며 종종 완전히 길을 잃고는 하지만, 그러다가 모든 것이 밝혀지며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곤 했다. 20권이 넘는 책을 쓴 작가로서 학식 있고 뛰어난 사람임에도 제임슨은 개인적으로 겸손하고 겸손했다. 수많은 헌사가 그의 제자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증명한다.


제임슨은 활동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1981년 소셜 미디어에 널리 유포된 야세르 아라파트 및 기타 팔레스타인 활동가 및 지지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그가 자신이 어느 편인지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그에게 캠페인을 지지하는 서명을 부탁하는 메일을 보낼 때마다 그는 재빨리 동의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곤 했습니다. 그는 많이 그리워질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 추모사 자체 번역

*학술적 번역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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