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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워질 수 없는 소외의 갈증

윤대녕, 《은어낚시통신》, 문학동네, 2010

by 꿈꾸는 곰돌이

윤대녕, 《은어낚시통신》, 문학동네, 2010


<은어낚시통신>은 소외와 그 소외에서 해방되기 위한 과정으로서 존재의 시원으로의 회귀를 염원하는 문제적 개인들을 다룬 소설이다. 윤대녕의 다른 소설이 그렇듯, 타락한 시대에서 물질적 충족으로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을 다룬다.


섹스를 해도 충족될 수 없는 갈증

한마디로 이 소설은 섹스 후 느껴지는 죄책감에 대한 서사이다. 육체적 쾌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찰나의 순간인 섹스를 한다고 해서 결국 존재의 갈증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작중 ‘나’는 메마른 섹스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조르주 바타유에 따르면, 섹스는 불연속적 존재인 인간과 불연속적 존재인 인간이 찰나의 순간 하나가 되는 연속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작중 ‘나’와 연인 ‘김청하’의 섹스는 작가의 시적 문장에도 불구하고 전혀 에로티즘이 느껴지지도 않을 뿐, 오히려 구슬프게 느껴진다.

그후로 몇 달 그녀를 더 만나면서 나는 으레 돈가스나 비프스테이크로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요령부득인 상타개 되어 여관에 들어가 메마른 섹스에 열중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돈가스, 맥주, 섹스, 비프스테이크, 맥주, 섹스, 돈가스, 맥주, 섹스 ...... 섹스에 미친 것이 아니라 왠일인지 무인도에 유배된 사람들처럼 다른 할 일을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먹고, 마시고, 합일되는 과정은 너무나 메마른 것처럼 보인다. 왜 섹스는 더욱더 갈증을 유발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육체적 에로티즘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타유는 에로티즘을 세 가지로-육체적 에로티즘, 사랑의 에로티즘, 신성의 에로티즘-으로 구분한다. 그중 육체적 에로티즘은 사랑의 에로티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나와 김청하의 관계에서 포착되는 에로티즘은 사랑의 에로티즘이 결핍되어 있어 보인다. 이 둘은 단지 서로의 존재론적 고독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 결합할 뿐, 서로에 대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어 보인다. 사랑이란 결국은 연인이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야 하나, 자본주의의 사물화의 논리와 일상적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 소외가 만연한 사회에서 결코 타인에 대한 온전한 신뢰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도시에서 지독하게 소외를 겪은 두 청춘이 제주도라는 공간에서 충동적으로 처음 결합했지만 이 둘이 연인의 관계가 아닌 어정쩡한 섹스파트너의 관계에 가까운 연애에 빠진 것도 소외의 산물일 것이다. 김청하는 인기가 별로 없는 모델이자 연예인 지망생으로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만, 나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다. 김청하의 의식을 지배한 앞으로의 두려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섹스로 해소될 수 없었고, 그렇기에 그와 메마른 관계에 환멸을 느끼고 이별하게 된다. 섹스는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늘 억압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에로티즘으로 다가오기 힘들다. 윤대녕의 소설이 담은 90년대의 사회도, 한국 자본주의가 찬란히 빛난 90년대에 쓰여졌지만, 본질적인 인간 억압의 체제였기 때문에 결국 메마른 섹스만 반복될 뿐, 궁극적 에로티즘의 섹스는 불가한 것이다.


은어, 그리고 히피적 공동체라는 인공낙원

인간이란 무엇인가? 윤대녕은 본질적으로 은어로 보고 있다. 인간의 고등의식이 화려한 도시를 이루었고, 물질적 풍요지만 그곳은 인공낙원이 아니다. 풍요롭지만 물질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는 곳으로, 목가적 영혼과 댄디로 무장한 영혼의 소유자에게는 억압과 천대가 존재하는 타락한 공간이다. 그런 세속의 공간에서는 아무리 육체적 쾌락을 좇거나 물질문명을 향유 하더라도 견딜 수 없이 허무할 뿐, 영혼의 본질적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영혼의 해방에 다가서기란 결국 불가능한 것일까? 윤대녕은 본질적 인간 해방의 표상으로 은유로서 은어를 들지만, 인간의 육체로서 은어처럼 존재의 시원으로 거슬러 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주인공이 초대된 64년 7월생들의 모임인 ‘은어낚시통신’으로 새로운 윤리의 공동체를 통해 속세에서의 영혼의 탈주를 모색한다. 그러나 그 탈주는 말그대로 히피적인 오컬트 공동체에 가깝고 결코 영혼의 해방이 아니다. 은어낚시통신은 일종의 금기에 대한 일탈적 장소이다. 이곳에서의 방종은 디오니소스제처럼 일상의 윤리에서 해방되는 찰나의 시간이다. 일상을 살다가 가끔 한 번 모여 금기를 위반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다 다시 모이는 형태로 운영되는데, 조르주 바타유가 말하는 금기 위반의 카니발 의식으로 느껴진다. 세상이 온통 메말라 갈증을 느끼는 64년 7월생으로, 은어처럼 촉촉해지기 위해 가끔식 모여 금기위반을 해제해가면서 젖어가자는 것이다. 모호한 묘사이지만, 홍대와 신촌 사이 어딘가 위치한 지하 공간에서 마약, 알콜, 섹스로 육체적 쾌락을 암시하는 이들은 과거 60년대 후반 미국에서 부흥했던 히피 공동체를 닮았다. 섹스, 마약, 오컬트로 요약할 수 있는 그곳처럼, 육체적 쾌락이라는 제의로 영혼의 해방이라는 제의를 지내는 곳처럼 보인다.


결국 <은어낚시통신>은 속세의 굴레에 사는 인간이, 또 다른 인공낙원을 통해 해방하려는 염원을 꿈꾸는 소설로 보인다. 인공낙원이야 해봤자 탈진해가는 또래가 모인 지하에 위치한 음습한 장소에 불과하겠지만, 이러한 인공낙원을 향한 갈망은 존재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이 갈증을 느끼며 부르는 목가로 들린다. 그 목가가 그린 존재의 심연이야 매혹적이지만, 결국은 도달할 수 없는 낙원에 대한 각주라는 점에서 90년대 소설의 표징인 허무함을 공격적으로 담아낸 시대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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