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독서일기
포르노그래피 사회에서 미의 구원이란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자본주의 사회의 냉소적 비판가인 한병철에게 긍정의 대상이 있다면 바로 에로스일 것이다. 에로스는 세속적인 포르노그래피와 달리, 은폐되어 있기에 신비한 마력이 있다. 그의 이전품인 『에로스의 종말 』에서 에로스에는 혁명적인 에너지가 있다는 것에 주목했는데, 이미 에로스가 위기를 맞이했으니 랭보를 인용해 재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 』은 에로스의 보존과 포르노그래피 비판의 연장선에 있다. 한
매끄러움,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점
“매끄러움은 현재의 징표.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p9)
한병철은 매끄러움에는 부정성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전작 투명사회에서 제기된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브라질리언 왁싱부터 제프 쿤스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부드럽고 매끄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 가다머는 부정성이 예술에 본질적이라고 보았고, 바타유는 에로틱한 것의 본질이 더러움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학자들을 인용해 매끄러움은 부정성이 제거된 형태의 미학화는 사실상 비미학화이며, 그것은 에로틱이 없는 포르노그래피라고 분석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매끄러움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징표일 것이다. 얼굴에 나는 여드름, 점, 각종 트러블을 제거하려고 애쓴다. 매끄럽지 못한 것은 부정적이며 미학적이지 않다고 규정해 세련되게 만드나, 오히려 이것이 현대적인 질병을 만든다. 가령 지나친 청결함이 만든 아토피를 비롯한 질병과 면역력 약화를 만들었다.
포르노그래피적인 디지털 미와 상실된 은폐의 미
한병철은 포르노그래피에는 에로티즘이 제대로 함유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즉, 사이비 에로티즘이다. 에로티즘은 더럽고, 죽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부정성이 혼재되어 있지만 포르노그래피는 은폐되지 않고 드러나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벤야민이 분석한 괴테의 미학인 베일의 미학과 괴리되어 있다. 고통과 상처 없는 매끄러움은 자연적 미와 다른 디지털 미와도 연결된다. 디지털 미는 타자의 부정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전적으로 매끄럽다고 말한다. 그것에는 어떤 균열도 없으며, 부정성 없는 만족을 만든다고 말한다. 바르트의 개념을 빌려와 오늘날의 이미지들은 스투디움만 있지, 풍크툼은 없다고 말한다. 에로틱한 사진을 포르노그래피적 사진과 구별시켜주는 것이 시각의 빈틈, 은신처이지만 너무나 투명한 포르노그래리 사회는 상처의 부정성이 없어 에로틱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미의 구원
미는 만족의 대상으로, 좋아요의 대상으로, 임의적이고 편안한 것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미는 구속력이 없다. 그 이유는 구속력이 있는 것을 향한 추구를 말하는 에로스가 결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이 추구를 충실함이라고 부르는데, 충실함과 구속성은 서로를 제약한다. 그러나 이 둘은 휘발성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미의 구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한병철에게 아름다움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이며, 그것은 또한 에로스의 구원이다.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는(p.70) 시대, 우리가 되찾을 것이 너무나도 많지만 굳이 우선 순위를 뽑아보면, 분명 에로스일 것이다. 이성의 질서로 설명할 수 없는 마력이 있는 존재인 에로스. 한 사람을 향한 리비도가 사회 변혁을 향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분명 타당하다. 사회 자체가 거대한 포르노로 타락한 시대, 우리는 부정성이 내포된,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에로티즘을 회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 』은 『피로사회 』, 『투명사회 』,『에로스의 종말』에 연장선에서, 미의 구원을 다루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름다움마저 상품화된 오늘날 미의 위기를 대륙철학의 전통에 서서 비판한다는 점이 탁월하나, 역시나 모호하고 원론적인 ‘구원’을 말한다는 점에서 아쉬운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