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의 말처럼 시인은 선택받은 견자이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타고난 존재이다. 그러니 더욱 불행하다. 이 사회에 일차원적으로 보이는 부조리와 인간 소외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보이지 않는 병폐까지 목격하는 시인은 진실로 괴로운 존재이다. 그러니 70, 80년대 투사 시인처럼 온몸으로 각의 시학으로 맞서 싸우거나, 아니면 90년대 시인들처럼 타락한 세계를 풍자 혹은 관조하거나 2000년대 미래파라고 불리는 젊은 시단의 시인들처럼 환상으로 도피한다. 이영광의 시는 세 가지 기조 중 어떤 것에 속해있지도 않으면서, 모두 다 해당한다. 이영광은 김수영 이후 김수영의 기조를 잇는 시인이면서도, 그의 온몸의 시학과 다른 유령의 시학으로 영혼으로, 영혼을 밀고 나간다.
이영광의 세 번째 시집 『아픈 천국』은 고통받는 원혼이 담긴 한국 사회의 진실한 초상이다. 교과서나 논문에서는 담을 수 없는 타자의 고통의 공동체인 ‘아픈 천국’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시집을 통해 진정한 한국 사회의 리얼리티가 담긴 역사적 기록으로서, 2010년 한국 사회를 다시 되돌아보자.
분명 아픈 사회
2010년 한국은 아픔이 가득한 사회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이 우리 삶 깊이 스며들며 체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민주적 정부를 자처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조차도 그 신자유주의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시 집권한 우파 정권인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그 결과로 2008년 촛불 시위가 일어났다. 그 시점부터 레임덕에 시달린 정부는 야당과 노동 계급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2009년에는 용산 남일당 건물과 쌍용차 공장에서 피와 눈물이 흐르는 사건이 일어났다. 억압받는 자들은 고통에 신음했고, 일부 선진적인 민중들은 목숨을 걸고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망루에 올랐고 그에 이어 대중들이 여전히 거리에 나섰다. 경찰의 공권력으로 무장한 명박산성은 결국 함락되지 않았지만, 분명 흔들렸다.
이런 계급 투쟁이 치열했던 2010년 문인들도 다시 광장에 섰다. 송경동처럼 거리의 시인으로서 전위에 선 시인도 있었고, 진은영처럼 문학의 정치성을 제시하며 미학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의 합일을 꿈꾸는 시인도 있었다. 이영광도 마찬가지로, 광장을 등지지 않았다. 환상세계로 도피하기보다 현실에서 환상적인 존재가 되어 배회하는 것들을 시로 옮겼다.
유령의 비명
이영광은 그 다음 대열에 서있는 것 같다. 송경동이 일상어, 현장어로 무자비한 국가 폭력과 체제를 고발한다면, 이영광은 유령이 되어 국가 폭력과 인간 소외를 고발한다.
시집 앞에 실린 세 편의 연작시 「유령」은 국가 폭력과 인간 소외로 인해 신음하는 유령의 발화라 할 수 있다. 첨단의 거리를 배회하는, 쉼 없이 증식하는 유령이며 그것은 죽음의 향기를 풍긴다. 특히 「유령 3」 은 국가 폭력과 이윤 논리로 희생당한 남일당 건물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아니라고 여겨서
죽였을 것이다
사람입니다, 밝히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다고…… 죽였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지만…… 죽였을 것이다
죽이고 싶었는데…… 죽였을 것이다
-「유령3」중에서
수려하거나 장식적인 표현 없이 섬뜩한 언어로 터벅터벅 걸어와 죽은 자들의 죽음을 말한다. 시인에게 사람을 죽여 유령을 잉태하는 국가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그러니 국가 권력은 사람을 살해하는 두려운 것이기도, 한편으로는 흉한 것이기도 하다.
크로노스 신화와 대한민국
“대한민국이여, 대가리에 쓴 그 대(大)자는/ 음경확대수술 후유증 앓는 곪은 귀두 같구나/ 커질 수만 있다면 문드러져도 좋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 반쯤 얼어터진 봄이 다 가도록/ 사람 죽여 원혼 만들고 (생략) 대한민국이여, 겨우겨우 키운 좆 움켜쥐고/ 사창가로 쳐들어가는 취한 수컷 같구나” (「대(大)」 중)
시인은 대한민국이 음경의 발기만을 위해 사람을 죽여 놓는다고 말한다. 이는 성장만을 위해 사람마저 죽이는 식인 자본주의를 음경을 통해 비유한다. 이 시에서 한 편의 신화가 떠오른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가 낫 공격으로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아이를 먹어 치우는 신화 말이다. 대한민국은 아버지를 거세하지 않은 크로노스 같다. 미국이라는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타자의 질서에 복종한다. 전혀 아버지를 거세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대한민국의 아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들을 먹어 치운다. 흉한 발기의 동력은 아이들을 먹어치우는데 있다. 그런 식인을 통해 발기할 수 있다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라고 말한다. 그 발기의 목적은 번식이 아닌 ‘사창가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지극히 흉한 발기다.
이 시를 급진적으로 읽어본다면, 권력 유지를 위해 아이들을 먹어 치우는 식인 대한민국을 거세할 제우스를 기대할 수 있다. 제우스와 그 형제들이 아버지에 반항하여 체제를 무너뜨린 만큼, 봉기를 통해 대타자의 질서를 전복을 꿈꾸는 염원이 숨겨져 있지 않나 싶다. 시집에서 봉기의 주체는 어떻게 묘사되는가? 바로 ‘아픈 천국의 큉한 원주민’이다.
아프지만 않으면 천국이다.
이 시집에 대한 감미로운 평에서는 이런 평가를 한다.
이영광의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폐허와 같은 이 세계의 잔혹함을 그리고 있기 떄문이 아니고, 더군더나 단순히 그 잔혹함을 자기 파괴적 치유의 길로 열어 놓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 대신 그는 죽음의 불가피성과 불가해성을 삶으로 수용하고 상처를 상처로 수락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길이 존재함을 보여 주고자 한다. 만약 우리가 고통의 희망이라는 것에 닿을 수가 있다면 그것은 생의 고통 한가운데 길이 지옥이며, 그 운동성 속에서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천국으로 가는 길이 지옥이며, 지옥으로 가는 과정이 곧 천국이지 않겠는가.
이 말을 달리 이해하면, 현실은 천국이다. 더 정확히 말해 자본주의는 분명 천국이다. 지난 200년간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한 기술로 인해 지난 수백만 년을 궁핍으로 굶주리던 인류가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 식량은 이미 전 인류가 먹이고도 남아 가축에게, 그마저도 남아 폐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즉, 기술을 통한 생산력의 측면에서는 이미 천국에 도달한 것이다. 문제는 아프다. 이 아픈 천국은 너무나 잔인한 고통을 준다. 그래서 시집에는 아픔, 상처,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점철되어 있다.
자연의 푸른 녹색 이미지에서 상처를 포착하거나 “녹색은 핏방울처럼 돋아난다. / 온 세상이 상처이다. (「녹색」) 자본주의 죽음의 경쟁 체제의 부조리함을 “죽도록 공부하라는 건/ 죽으라는 뜻이다” (「죽도록」) 라고 발화한다. 이러한 시들은 정녕 자본주의 사회가 천국인지, 지옥인지 헷갈릴 정도의 고통을 준다.
낙관적으로 말하자면, 아프지만 않으면 분명 천국이다. ‘아픔’은 체제의 고통, 이윤을 위해 사람을 살해하려고 시도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저지르는 폭력이 낳은 상처이다. 이 상처는 자본주의라는 실체 없는 ‘유령’이 아니라, 국가가 주체가 되어 저지른다. 레닌의 말대로, ‘국가는 지배계급의 지배 도구’이기에 국가가 자꾸 아프게 만든다. 흉하게 발기하는 국가 ‘대한민국’에 맞서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은 정치적 선전가가 아니므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여러 선배 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영광에게도 시적인 추상적 투쟁 전략이 있다. 그것은 사랑으로 무장하는 여러 시인들처럼, 사랑으로 무장하는 일이다. 사랑에는 상징계의 질서를 초월하는 마력이 있으니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 저렁게 미치는 것이 옳겠지/ 저 물결 다 놓아보내주고도 여전한 수량/ 태우고 적시면서도 뜯어말릴 수 없는 한몸이라면, 애써 물불을 가려 무엇하랴”
- 「물불 」 중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말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몸 적실 의향이 있지만”
-「사랑의 미안」 중
시인은 ‘아픈 천국’에서 여전히 사랑을 발화한다. 시인의 말대로, ‘사랑은 참을 수 없’(「밤이 깊으면」) 는 존재이기 때문에, 분명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에서 아프지 않으려면, 사랑으로 무장해 “물불 가리지 않고” 아픈 천국의 원주민으로서 싸워야 하지 않을까.
시집에 대한 급진적 읽기를 해보았다. 같은 아픈 천국의 원주민 동지들이여. 사랑으로 영혼을 무장하여 대한민국을 거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