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불황>
시작하며
-현재까지 읽은 목차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자본주의의 이윤율 하락 경향으로 장기적인 침체에 빠졌고, 이는 구조적 위기이다. 본장에서 캘리니코스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통해, 전쟁이나 노동 조건 악화 등 평범한 사람을 고통을 받게 하는 방법으로 밖에 이윤율 하락을 극복할 수 없음을 밝힌다.
우선, 마르크스의 경제 위기 이론의 핵심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에 있다. 시장에서 개별 자본은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혁신을 통해 경쟁 자본들보다 비용을 줄여서 수익성을 높이려 한다. 그러나 전체의 관점에서로 보면 결과는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생산수단에 투하된 자본[불변자본] 대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급하는 데 들어간 자본[가변자본]의 비율)이 상승한 건이다. 이윤율(총투자에 대한 수익의 비율)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잉여가치율(노동자들을 얼마나 착취하는지를 나타내는 비율)의 함수다. 왜냐하면 새 가치의 원천은 노동자의 노동이기 때문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승하는 결과로 장기적으로 평균이윤율은 저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낳은 위기에 대한 대응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었다. (캘리니코스는 레짐이라고 부른다.) 신자유주의 이전인 1980년대 초까지른 매우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어 추락하던 이윤율이 신자유주의를 통해 회복됐다. 신자유주의는 마법이 아니라, 단지 핵심적으로 노동자의 몫을 뺏었다. 그래서 조직 노동자들을 공격해서 착취율(잉여가치율)을 끌어올린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금융시장 규제가 완화된 것을 통해 더 광범한 금융화 과정을 야기했다. 이는 자산 거품(버블)을 낳았고 이윤율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버블들은 유효수요를 자극하는 매커니즘 역할을 했다. 이런 상황은 '민영화된 케인즈주의'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서프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거품이 터지면서 전 세계 경제를 무너뜨렸다. 완전히 쇼크였다.( 캘리니코스는 주류 학자들이 이것을 쇼크라고 하는 것에 못 마땅한 듯 하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 연준이 주도한 양적 완화는 세계 금융 위기가 1930년대만큼 심각한 경제 불황으로 악화되는 사태를 막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회복에 대해서 '장기 침체'논쟁이 벌어졌다. 로런스 서머스 같은 부르주아 학자들슨 오래된 선진 자본주의 핵심부의 느린 성장은 구조적 변화를 의미한다고 본다. 같은 생각을 포스트케인지언 제임스 갤브레이스는 이를 더 급진적으로 표현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의 세계 패권 구축에서 토대 구실을 한 경제 모델 전체가 경제적, 지정학적, 생태적 이유 때문에 수명이 다했다는 것이다.
경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중앙 은행이 나서 직접 정부의 채권을 매입하며 양적완화를 시행한 것은 일종의 '재정의 화폐화'라 할 수 있다. (다중위기의 시대로 알려진 부르주아 학자)애덤 투즈는 이런 대규모 경기 부양 지출의 화폐화를 급진적 케인스주의의 승리가 뒤늦게 찾아온 것으로 말했다. 즉, 이 체제가 기술 관료적 케인스주의라는 것이다. 기존 케인스주의와 달리, 중앙은행과 독립적 규제 기관의 기술 관료들에 의해 운영되고 그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한다. 그 화페 기술 관료들은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 사이에서 하는 구실 덕분에, 전통적 자유주의 입헌정치 체제의 제약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국가는 금융 시스템을 위한 담보물 공장이 되었고, 비상시에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은 대부분 이 담보물의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한다.
2008년과 2020년에도 시장은 통제하기 힘들정도로 흔들렸고 결국 국가가 개입해서 시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재난 시대와 함께 하는 기술 관료적 케인스주의의 출현은 신자유주의의 종말인가?
캘리니코스는 신자유주의는 세 가지 차원으로 정리한다. 이데올로기적 측면, 자본가 계급 권력의 재천명, 경제정책 레짐의 측면에서 살펴본다.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신자유주의는 이 세가지 차원을 각각 발전시키고 지켜왔다. 따라서 오늘날 재난의 시대 속 신자유주의의 변화는 신자유주의의 종언과 전복보다는 상황에 맞춘 일정한 변형으로 봐야한다. 여전히 신자유주의의 잔재가 여전하니까. 우리는 여전히 싸워야 한다. 캘리니코스의 말을 빌리자면, "신자유주의를 쳐부수고 다른 미래로가는 길을 열려면, 앞서 알한 위로부터 주도력보다는 그에 필적하는 아래로부터 [투쟁의]분출이 필요할 것이다. "
과거 뉴딜의 추진력으로 작용했던 것이 루스벨트의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노동조학 결성과 공장파업의 영향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