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서울, 싸늘함 속에서 마주한 사랑의 깊이
눈 내리는 서울, 싸늘함 속에서 마주한 사랑의 깊이
-김정환, <겨울, 너에게>
그대, 만남의 설레임 속 은밀한
기쁨의 내장까지 시리고 시린
아리고 아린 겨울 입맞춤의 바람, 그 깨물어대는
송곳니여
그대, 내 몸살의 이마에 와닿는
상긋한 서릿발의 내음
끝으로
침묵이여 사랑이여
좀더 싸늘해다오
싸늘함의 진도를 알고 싶다
싸늘함의 끝장을 보고 싶다
이 모든 살아있음의 한계를
두려운 사랑의 입맞춤으로
사랑의 온몸 더듬기로.
-김정환, <겨울, 너에게>
일요일 눈 내리는 상암 DMC를 걷는다. 도시 위로 떨어지는 흰 눈송이들은 침묵 속에서 꾸밈없는 소리를 만든다. 저마다의 길 위에 쌓이는 눈은 사람들의 전쟁 같은 일상을 덮어, 내면의 고요함을 잠깐이나마 불러내는 듯하다. 거리에 들러붙는 쓸쓸함의 온도 속에서, 김정환 시인의 이 시가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정환의 이 시는 겨울의 차갑고도 날카로운 입맞춤처럼 들었다. 시 속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그 사랑은 따뜻한 온기가 아니라 얼음장 같은 싸늘함 속에서 피어난다. 사랑은 설레는 것인 동시에 아프고 시린 것임을, 한겨울 바람 속에서 마치 나를 덮쳐오는 듯한 송곳니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날카롭고도 진득하다. 피부에 와닿는 서릿발처럼 섬세하지만 찌르는 느낌으로 전해진다.
눈 내리는 상암을 걷다가, 문득 내 숨결이 희미하게 하얗게 퍼지는 장면이 떠오른다. 사랑이란 어쩌면 그렇게 눈에 보일 만큼 희미한 온도로, 누구나 갖고 있지만 손끝에서 사라지는 한기가 아닐까. 시의 "싸늘함의 진도를 알고 싶다"는 대목에서 멈춰 서게 된다. 왜 사랑에서조차 우리는 싸늘함을 느껴야 하는가. 왜 사랑의 끝장을 보고 싶다고 외칠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랑을 통해 웅크린 내 감정의 극한을 마주하고, 내가 어디까지 살아 있음인가를 확인하려는 시인의 선언일 것이다.
거리의 끝에 서서 한적한 담벼락을 바라보니,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그 아래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겹쳐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서로를 짓밟고 지나가며, 싸늘한 진동만을 남기는 존재가 되는 것인가. 하지만 발자국이 얽힌 자리에서 눈이 다시 내려 모든 흔적을 덮듯, 우리는 사랑 속에서 다시 무한히 애정과 고통을 겪는다. 싸늘함은 곧 새로운 삶의 무대로 가는 관문처럼 느껴진다.
김정환의 시를 떠올리며 걸음을 옮길 때, 서울의 겨울은 더욱 침묵에 잠겨 있었다. 이 도시 속의 모든 관계는 따스함과 추위를 동시에 간직한 채, 그 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싸늘한 겨울을 뚫고, 그 끝자락이 보이는 날에야 비로소 사랑과 삶의 진의를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시의 마지막처럼, 사랑과 삶의 "온몸 더듬기"를 위해 이 고독한 겨울 거리를 더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눈송이가 손등 위에 사라지듯 덧없는 순간인데도,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소한 기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