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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민중운동을 잇는 다리

김정환, 『황색예수』, 문학과 지성사, 2018

by 꿈꾸는 곰돌이

문학과 운동을 잇는 다리, 해방신학

크리스마스 이브와 당일을 교차하는 밤, 김정환의 시집 『황색 예수』를 읽다. 총총히 빛나면서 가장 낮은 곳에서 빛나는 이 시집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이 찬란하지만 가장 겸손한 이름으로, 단아한 사랑의 세계를 묵묵히 걸어가는 이 시인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를 감히 재림예수의 한 형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기독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얕게 알고 있어 함부로 논하기 매우 어려운 일지만, 김정환이라는 이름은 그 옛날 그리스도를 떠오르게 한다.

80년대 현대시를 결정지은 두 명의 시인이 있다. 그 유명한 황지우와 이성복이다. 이들의 정체성 및 시적 지향은 철저하게 중간계급적이었지만, 이들은 중간계급으로서 스스로에 대해 자기비판이 날카로웠으며, 결국은 민중지향적이었다. 그러나 결코 중간계급 지향의 한계를 지울 수 없었고, 그 이후 2000년대 미래파 혹은 귀족예절론자들 특유의 중간계급적 시 세계-지배계급을 혐오하고, 대중과 괴리를 느끼는 데서 시적 세계-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80년대 황지우와 대비되는 시세계이면서도, 내게 훨씬 더 근친성을 느끼는 시세계는 김정환의 시세계이다. (김정환 시인과 사적으로 알던 은사님의 표현으로는) 후렴만 있다고 할 정도로 단순명료하면서도 실천적이며, 그러니 매력적이다.

김정환의 시에서 구현된 예수의 이미지는 고귀한 메시아가 아닌, 낮은 곳에서 재림한, 투사이자, 민중의 구원자로 다가온다. 김정환은 80년대 문학운동의 맥락을 이야기하면서 “ 예술지상주의로부터의 탈피를 ” 꾀해야 한다면서 “인간 해방과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우리 시대 민중 운동의 당면 과제”이며 이를 위하여 “ 문학이 운동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 민중 운동의 흐름에 정서적 에너지와 구체성과 인간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 흐름을 대중화” 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즉, 그에게 문학과 운동은 하나이고, 이 과정에서 예수를 진보적으로 해석한 해방신학을 통해 이 둘을 잇고 있다.


지워지지 않는/ 지울 수 없는/ 그 날의 그 아픔 그대로/ 나는 그대 곁에 있을 것입니다.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그대가 너무 춥지나 않게/ 그대가 너무 지치지나 않게/ 그대가 너무/ 초라하지 않게/ 나는 항상 그대의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입니다

-「최후의 고백」 중


이 시집을 읽으며, 오늘날의 재림예수, 해방신학에서 그토록 말하는 메시아를 생각해본다. 오늘날, 타락한 한국사회에 예수가 존재한다면 분명 어디에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러니 나는 확신한다. 성대한 대형 교회가 아닌 모두에게 열린 광장에 있다고. 거리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는’ 향린교회 등 돈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는 교인들의 기도회에, 혹은 정의구현 사제단의 미사에 있을 것이라고. 국회나 증권가가 아닌, 남태령 고개와 혜화역 전장연 동지 곁에, 혹은 고공농성에 오른 한국옵티칼 조합원의 편에 있을 것이라고. 차마 확신한다. 처절한 상황에서 철저하게 확신한다. 또한 예수는 성지 예루살렘을 강탈한 이스라엘의 편이 아닌, 그곳에서 목숨 걸고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불사르는 팔레스타인 해방 투사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우파들이 왜곡한 타락한 성경이 아닌, 김정환의 민중시가 솔직하게 발화하고 있는 예수는 가장 겸허한 투사이자 동지이다.


오늘 밤 매판의 도시는 다시 휘황찬란한다/ 완강하게 갈라진 채로/ 오늘 밤 사랑의 결도 갈라져 끼리끼리 뒤채이리라/ 안녕. 이 밤도. 그대를 위해 잠을 자지 않겠다.

-「황색 예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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