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서사의 위기』, 문학과 지성사, 2023
한병철, 『서사의 위기』, 문학과 지성사, 2023, 최지수역
한병철의 저작의 제목은 직관으로는 동의하기 힘들다. 피로사회, 아름다움의 구원, 타자의 추방, 투명사회 등 제목만 듣자면 동의하기 힘든 것들이 많다. 이것을 쉽고, 그럴싸하게, 독일철학을 비롯한 대륙철학으로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 작가 한병철의 매력적인 능력이다. 한병철의 저작 중 최신에 나온 부류에 속한 『서사의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의 제목만 듣자면 동의하기 어렵다. 서사의 과잉이 아닌가? 과거와 달리, 웹컨텐츠의 성장과 1인 미디어의 발달로 오히려 서사 과잉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장 <이야기에서 정보로>에서 작가는 서사와 정보를 분류하고, 오늘날 정보의 과잉 및 서사의 위기를 말한다.
멀리서 오는 서사와 무간격적인 정보,
저자는 벤야민을 인용해 서사는 멀리서 온다고 말한다. 문학에서 형식주의를 배운 내 방법대로 말하자면, 발신자와 수신자의 경로가 멀다. 정보가 직선적이라면 서사는 멀리서, 경유해서 온다. 그러니 원격성이 점진적으로 해체되는 근대에서는 서사가 아닌 정보가 각광받게 되었다. 정보는 즉시성이 있고, 설명되며 소비성이 있다.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서사와 달리, 즉시 주어지는 정보는 벗거벗은 삶이며 경험의 빈곤을 나타낸다. 이 책의 사상적 토대가 되는 비평가는 단연코 발터 벤야민이다. 저자는 그 유명한 『아케이드 프로젝트』, 『이야기꾼』 을 비롯해 벤야민의 탁월한 저작들을 가져와 경험의 빈곤을 낳는 근대를 규정한다.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을 빌려와 저자는 서사가 없고, 좋아요와 편리함만 있는 후기 근대는 아우라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즉, 벌거벗음이다. 또한 정보사회와 투명사회에서 벌거벗음은 외설로 확대된다고 말한다. 정보는 사물을 감싸는 껍질인 베일이 없고, 그래서 포르노적이다. 서사가 사소한 것에도 집중해 에로티즘을 보여준다면, 포르노는 바로 본론에 향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기억과 세계의 탈신비화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이것이 인간 능력의 한계이자, 그 한계가 주는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에서 등장한 무의지적 기억을 예로 들며, 인간의 기억이 서사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세계의 신비로움과도 맞닿아있다. 그러나 저자는 서사가 없기에, 사물에는 신비로움이 없고 이것이 곧 현대 사회 자체가 탈신비화되며 탈아우라화되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사물이 존재를 잃고 목적에 따라 도구가 되었다고 말한다. 21세기에 이에 부합하는 사물은 스마트폰일 것이다. 스마트폰은 타자를 추방하여, 공동체를 침식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또한 스마트폰 없이 생활하는 사람을 포노 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치유의 스토리텔링에서 스토리셀링으로
저자는 벤야민의 『사유 이미지』와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인용해 이야기의 치유능력을 말한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치유의 마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스토리텔링이 넘쳐나지만 이야기하는 분위기는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효율의 논리 때문이다. 그래서 스토리셀링으로서 스토리텔링이 서사의 위기를 낳는다고 말한다.
한병철의 저작을 사랑하는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회 비평서다. 한병철 특유의 서사 방식과 그가 사용하는 용어에 익숙한 상태에서 읽어서인지 어렵지 않게 쉽게 읽었다. 다른 이들이 SNS 중독만을 이야기 할 때, 서사의 위기를 말하는 철학자 한병철의 시선은 훨씬 더 깊은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많은 작업이 벤야민과 하이데거의 영향에 있고, 투명사회나 타자의 추방 등 전 작품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우선 책을 덮으며 인스타그램을 지웠다. 우리의 서사를, 나의 서사를 재발견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