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의 동화>-미완으로 완성되는 홍콩 멜로의 정점
홍콩 영화 배우 중 주윤발을 가장 좋아한다. 취향에 이유가 있겠느냐만, 오우삼 감독의 말대로 현대의 기사도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대표작 <첩혈쌍웅>과 <영웅본색>에서 기사도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느와르라느 장르 특성상 영웅호걸의 모습이 더 강조되기에 그 진정한 면모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진정한 기사도의 모습이 드러나는 영화는 <가을 날의 동화>라고 할 수 있다.
메이블청 감독이 만든 1989년작 <가을 날의 동화>는 뉴욕의 가을을 배경으로, 낯선 미국 땅에서 시작된 애틋한 두 남녀의 사랑과 결별을 다룬 작품이다. 주윤발과 첸추이를 주연으로 한 이 영화는 겉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속에는 이민자의 정체성, 인간의 외로움, 그리고 사랑이 가져오는 삶의 마력이 조용히 깃들어 있다. 이 작품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지닌 특유의 쓸쓸함과 로맨틱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추풍이 주는 신선함에 주윤발이 피는 담배 연기가 영화를 타고 건너오는 듯하다.
뉴욕으로 온 새내기 유학생 제니퍼(첸추이)는 생경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좌충우돌하며 불안한 삶을 이어간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남자는 선원 출신에 잡일을 하며 도박과 술이 인생의 전부였던 허풍스러운 낭만주의자, 삼판(주윤발)이다. 그는 겉으로는 제멋대로에 장난기가 넘치지만, 그 안에는 섬세한 배려가 가득한 따스한 인간미와 연약한 외로움이 깃들어 있다. 둘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제니퍼의 애인의 바람으로 인해 점차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은은한 위로가 싹튼다.
영화를 보는 동안 대서양에서 불어온 맨하튼의 쌀쌀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는 듯했다. 삼판의 작은 도움과 유머는 제니퍼에게는 삶의 등불처럼 느껴지지만, 그 도움은 절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강요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의 순수함을 보여주면서도, 그 모든 것이 결국 지나가는 계절처럼 덧없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이 영화가 지닌 고독의 미학이자 주윤발의 기사도 이미지를 극대화해 보여준다.
특히 둘이 결별하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제니퍼는 삼판의 곁을 떠나는 선택을 한다. 삼판은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며, 그녀가 떠난 뉴욕의 풍경을 마주하는 장면은 깊은 멜랑꼴리의 여운을 준다. 자신의 감정을 삭이고 묵묵히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은 가을날의 낙엽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슬프다. 이별은 사랑의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때로는 한 발 물러서야만 진정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이 장면은 말없이 가르쳐준다.
<가을 날의 동화>는 화려하거나 격정적인 연출 없이도 눈물샘을 자극한다. 상류층의 부티나는 가짜 사랑이 아닌, 지하철 소음이 들리는 싸구려 건물에서도 사랑이 있다면, 머나먼 이국에서도 삶이 다채로워지는 현상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 영화가 녹여낸 뉴욕의 풍경은 마치 또 다른 주인공처럼 두 사람의 감정을 감싸 안는다.
내게 <가을 날의 동화>는 마치 낙엽처럼 언제나 일시적이고, 바람처럼 붙잡을 수 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모든 풍경은 상처로 인지된다던 김훈의 말을 영화한 것 같은 풍경이다. 이 영화는 작은 상처가 되어 사랑의 아픔과 그것으로 얻는 성장을 보여준다. 쓸쓸한 가을, 풍요로운 뉴욕의 풍경과 사랑의 쓸쓸함이 합쳐진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지닌 낭만적 본질이 아닐까.
가을이 올 때마다 나는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사랑은 때로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지라도,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의 순간은 여전히 따뜻하게 가슴에 남아 있을 테니까. <가을 날의 동화>는 그런 사랑의 조각들을 우리에게 가만히 건네주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