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부터 방송 작가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 당연히 방송 작가가 되기 위해서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지만,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고된 수업과 끝없는 수정, 때때로 느껴지는 좌절 속에서도, 꿈을 위해 묵묵히 버티고 있다.
힘들 때마다 조지 오웰의 문장을 곱씹는다. "나는 왜 쓰는가." 그가 말한 네 가지 이유를 떠올린다.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그리고 정치적 목적. 그리고 그 마지막 이유에서 나는 멈춘다. 정치적 목적. 나는 왜 쓰는가? 무엇을 위해 쓰는가?
남들보다 운이 좋게 일찍부터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부모의 영향도, 개인적 경험도, 그리고 책의 도움도 있었다. 그 덕에 급진적인 사상을 세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기자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저널리즘말고 다른 방식으로, 픽션과 인문학의 힘으로 정치적인 것을 예술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다. 누구에게는 낭만적인 선택이고, 누구에게는 불확실한 길이겠지만, 나에게는 필연이었다. 단순히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 때문만이 아니다. 내가 살아온 세상, 불평등과 억압의 구조 속에서 눈치 채지 못한 채 익숙해진 것들을 해체하고, 다시 쓰고, 또 다시 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것을 텍스트의 힘으로 해내고 싶었다.
존 버거를 좋아한다. 그의 글에는 세계를 바라보는 다정한 시선이 있다. 나는 그의 문장에서 배운다. 그처럼 다정한 글을 쓰고 싶다.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희망과 연대를 건넬 수 있는 글. 비판만이 아니라 사랑도 담길 수 있는 글. 방송 작가라는 꿈을 품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대중이 소비하는 이야기 속에 진실을 심고 싶었다. 랑시에르처럼 프롤레탈리아의 꿈과도 같은 이야기. 가진 자들의 시혜가 미덕으로 포장되지 않는 이야기, 투쟁이 낭만적인 희생으로 소비되지 않는 이야기. 나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야기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세계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또한, 방송 작가라는 직업은 프리랜서로서 시간을 확보해 줄 것이다. 당연히 그 시간을 정치 활동에 쓰고 싶다. 동시에 글을 통해 선전하고, 선동을 자극해 변화를 만들고 싶다. 언어가 가진 힘을 믿지만, 언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고, 쓰고, 동시에 행동할 것이다. 그람시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곧 지지자가 된 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글이 때로는 너무 무거워 손끝에서 미끄러진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나는 언어조차 계급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안다. 한 문장을 고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주저한다. 내 언어는 진정 민중의 것인가? 내가 쓰는 이 문장이 혁명의 불씨가 될 수 있을까? 때로는 두려움에 글을 덮는다. 그러나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온다. 조지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존 버거가 그렸던 것처럼 다시 글을 쓴다.
나는 왜 쓰는가? 나의 글이 사라지더라도, 그것이 남긴 흔적이 다음 세대의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 어떤 아이가 내 이야기를 보고 새로운 가능성을 꿈꾼다면. 그리고 그 꿈이 혁명이 된다면. 나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다시 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