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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에게 배운 것

by 꿈꾸는 곰돌이

홍콩 영화에게 배운 것


나는 홍콩에 가본 적이 없다. 홍콩을 직접 걷고, 그곳의 하늘이나 바다, 거리의 숨결을 느껴본 적은 없다. 구룡 반도의 습도가 어떤지, 그곳에서는 어떤 냄새가 섞여나는지, 그곳에서 통조림의 유통기한은 정말로 만년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홍콩은 내 안에 있다. 그것도 흐릿한 꿈 같은 방식이 아니라, 선명한 색과 장면들로 고스란히 박혀 있다. 내가 본 것은 영화이고, 내가 사랑했던 것은 그 영화가 그리던 홍콩이다.

먼저, 주윤발의 롱코트를 떠올린다. 그 검은 롱코트의 깃을 세우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화면을 가로지르던 <영웅본색> 속 마크의 모습은 나에게 멋이 무엇인지에 대한 첫 번째 답을 제시했다. 현대의 기사도, 느와르 속 무협 영화의 대형의 모습인 신사였다. 입 끝에 걸려 있던 담배 한 개비는 단지 기호품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그에게서 나는 말보루의 묵직한 향과, 옷 위를 스치고 흩날리는 도시의 바람, 그리고 묵묵히 고독을 견디는 기사도의 품격을 배웠다.

그 고독한 멋을 다시금 인식한 건 <천장지구> 속 유덕화가 선글라스를 쓰고 오토바이를 타던 순간이었다. 잘 빠진 데님 셔츠 하나만으로도 그의 실루엣은 도시와 하나가 되었던 장면은 청청 패션의 아름다움을 알려준다. 무법자에게 펼쳐지던 네온사인들 아래, 그의 강렬한 눈빛은 그 자체로 삶의 어떤 자유로움과 쓸쓸함을 가리켰다. 나는 그 선글라스 뒤에서 세상을 무심히 바라보는 법을, 셔츠 깃에 느슨하게 얹힌 무관심의 멋을 배웠다.

그리고, <중경삼림>에서 양조위를 처음 봤을 때. 머리를 단정히 넘기고 포마드를 바른 그의 모습은 단순히 단정한 외모 이상이었다. 계급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경찰이 멋질 수도 있구나를 처음 느꼈다. 그 포마드가 뭍어난 머릿결은 마치 홍콩 도시 자체의 반짝임 같았다. 번잡하고도 슬프지만, 그렇게 반짝거릴 수밖에 없는 도시의 비밀을 그는 그의 외모와 행동 그 자체로 설명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비정전> 속 장국영이 내게 음악을 물려주었다. 한 손엔 술잔, 다른 손엔 라틴 재즈의 리듬을 쥐고 흔드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마력적이었다. 그에게서 배운 것은 단지 음악의 한 장르가 아니라, 깃털처럼 가벼워 보이지만 실은 무겁고 깊은 어떤 감정들이었다. 무심한 듯 살살 어루만지는 라틴 재즈의 선율이 장국영의 얼굴 위로 흘렀다. 나는 그의 존재 속에서 멜랑콜리와 낭만이 어떻게 하나로 융합될 수 있는지 배웠다.

홍콩은 그런 곳이었다. 내가 경험한 영화 속 홍콩은 단순히 한 지역이나 도시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가 격렬히 부딪히고도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는 영어와 광둥어가 동시에 들리고, 네온사인이 깜빡이는 골목 너머로 중국식 찻집이 얼굴을 내민다. 바쁜 금융가의 빌딩들 사이로 아직도 오래된 시장과 낡은 노점이 있다. 이질적인 것들의 충돌 속에서도, 홍콩은 매혹적으로 유연했다.

나는 홍콩에 가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홍콩은 내게 존재하지 않은 고향 같으니까. 어차피 중국에 반환되며 더욱 타락한 그곳에 갈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내 머릿속의 홍콩은 항상 그곳, 반환 전 불온하게 반짝이던 시절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주윤발이, 유덕화가, 양조위가, 그리고 장국영이 영화 속에서 가르쳐준 그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통해 옷차림과 담배, 음악과 머리 모양을 배웠지만, 궁극적으로는 삶의 태도 자체를 배운 셈이다. 멋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견뎌나가는지에 대한 통찰임을. 그리고 나는 오늘도 홍콩의 색을 꿈꾼다. 네온이 빛나고 느린 재즈가 흐르는 밤의 골목에서 한 조각 고독을 떼 내어 걸치고 그 도시를 거닐던 영웅들처럼. 그들은 도시에 살았지만, 분명 그곳에 속하지 않고 어쩌면 강호에 산 신사들이었다. 마치 그들처럼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낭만에 잠겨 여의도 고층 빌딩 아래를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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