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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곰돌이 Sep 23. 2023

마르크스주의와 메시아주의

'기억의 정치학' 벤야민의 메시아주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서는 메시아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관념론에 의거한 낙관적이고 수동적인 메시아주의는 능동적 실천을 중시하는마르크스주의와 만날 수 없는 '안티테제'에 가깝다. 메시아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메시아의 재림을 대망()하는 신앙이다. 이 세상은 인간의 구원을 방해하는 사탄의 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메시아는 이 힘에 도전하여 사탄을 타파해 간다는 것이다. '이다. 물론 이는 종교에서 말하는 좁은 의미의 메시아주의이고, 오늘날 메시아주의란 메시아(초월적 존재)가 나타나 고통받는 모두를 구원할 것이라는 사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이다. 혁명적 정당을 통해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이 스스로 세상을 변혁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구원'이다. 이런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과학적이라 장점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혁명은 노동 계급만 주도할 수 있고 노동계급이 혁명적이지 않다면 성공할 수가 없다.  그러니 현재와 같이 노동계급이 혁명적이지 않을 때,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일부 소규모의 좌파 조직은 일종의 '메시아주의'적 믿음을 전제로 활동한다. 신을 믿기보다 언젠가 혁명이 내려온다는 것이다. 사실 변혁을 염원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혁명이 오겠지'라는 믿음의 정도가 양적인 차이는 있을 지라도,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마르크스 분석을 이해한 사람은 자본주의에 포섭되어 자본가에 편에 서거나, 아도르노처럼 학술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분명 희망보다 절망의 시대에 활동하는 대다수의 활동가들의 무의식에 메시아주의가 깔려 있는데,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자는 메시아주의를 어떻게 봐야할까?


 우선 유대 메시아주의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비평가인 발터 벤야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철학테제>, <아케이드 프로젝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같이 훌륭한 명저들을 남긴 벤야민의 사고 방식은 -그가 번역한 동명의 위대한 소설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특히 그는 유대 메시아주의와 마르크스주의적 사고 방식을 혼재해 사용했다. 이런 사고 방식을 '양극적 사유'라고 하는데, 유대교의 메시아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유물론을 통해, 과거를 회상해 구원의 흔적을 찾는 것이 벤야민 일생의 거대 기획이었다. 물론 파시즘으로부터 도피를 하다 죽었기 때문에,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같은 그의 기획은 미완성이었으나, 그의 마지막 글로 알려진 <역사철학테제>는  그를 한 명의 완성된 사상가로써 완성시켰다. 


  <역사철학테제>의 핵심은 역사를 '구원의 관점'에서 봐라본다. 즉, 역사는 열린대상이자 구성의 대상이다. 이는 기존 역사주의와 좌파 주류의 낙관주의 및 기계론적인 역사관가 대비된다. 기존의 역사관이 역사를 일어난 사건과 사실의 연쇄로 바라보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무한히, 자동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진보하는 어떤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대비된다. 벤야민에게 신학적 사유는 역사를 완성되지 않은 것, 하지만 완성할 것을 요구하는 어떤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역사는 주어진 집적된 사실들의 더미로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기억괴 구성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즉, 벤야민에게 역사는 실증적 사실자료를 다루는 과학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프루스트의 작업처럼) 기억의 대상이다. 

 벤야민은 역사를 보는데 있어,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채택한다. 그러나 사적 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인형 안에 있는 그것을 움직이는 '숨은 형상'으로 메시아주의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메시아주의는 결코 수동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벤야민은 2번 테제에서 역사인식에서 구원과 행복의 이미지를 '미약한 메시아적 힘'을 지닌 주체의 정치적 실천과 연결하는데, 과거는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미 우리에게는 이미 미약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에게는 괴거가 준 과제와, 그 과제를 이룰 힘이 놓여있고 현재 정치적으로 이행해야 할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그에게 역사의 천사는 구원자가 아니라, 역사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경고이자 사자이며, '사람들에게 뭔가를 줌으로써 행복하게 하기보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걷어냄으로써 해방하는' 존재이다. 이런 측면에서 벤야민에게 진보는 결코 긍정적것만은 아니다. 진보의 폭풍이 인간을 소외시키며, 파국으로 이끈다고 봤다. 그렇기에 벤야민에게 진정한 역사인식은 인식하는 자의 현재가 특정한 과거와 만나 이루는 '성좌구조'의 이미지, '정시상태의 변증법'으로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주체는 소거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역할이 강화한다. 

 벤야민이 사용하는 용어와 사유들의 뿌리는 분명  신학이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신학은 역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존으 신학과 달리, 오히려 하루하루가 최후의 심판일이 될 수 있는 주체에게 나타나는 특정한 신호, 역사의 불연속적인 구조 속에서 억압받은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곧 그의 신학은 현실에서 세속적인 정치 개념들, 즉 역사 유물론으로 치환된다. 


 희망은 보이지 않고, '영구적 위기가 도래한 시대'에 좌절만을 갖고 살 수는 없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좌절의 시대다. 혁명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이 사회에 메시아주의에만 빠져 수동적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벤야민이 말했던 것처럼 혁명가는 이미 메시아적 힘을 일부 받았고 역사 유물론적 실천을 해야 한다. 하루하루가 심판일인 다중 위기의 시대, 혁명가라면 과거를 기억해 혁명적 기회를 포착하여 미쳐가는 열차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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