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미래를 구할 수 있을까? 트럼프2기에 보는 트럼프의 집권
마이클 무어의 <화씨 11/9>: 과거가 미래를 구할 수 있을까? 트럼프2기에 보는 트럼프의 집권
지금의 나를 어떻게 수식할까? 혁명가 유망주? 창작 및 방송 유망주? 그 화해하기 힘든 두 극단에서 미칠 듯이 방황하고 있다. 정치 활동도, 창작활동도 둘 중 하나에 온전히 몰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나다. 마르크스주의라는, 계급 사회에서 영원한 진리를 알고 있는 자가, 해법이 아닌 우회-혹은 회피를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부끄럽다. 근데 제3자의 시선에서는 나름 진보적인 저널리즘의 유망주로 보이나 보다. 뉴스타파, pd수첩, mbc나 한겨레 기자를 추천한다. 너가 아니면 누가 하냐고들 하는데... 아무튼 내가 추구하는 것은 최승호나 김어준 같은 진보-리버럴 언론인은 아니다. 그렇다고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같은 영상 예술의 대가도 아니다. 혁명가를 꿈꾸고 있지만, 현실이라는 핑계로 현실을 마주보지 않고 있다. 아무튼 현재 내 지향점은 마이클 무어다. 이것은 운동에 입문하기 전 대학교 새내기였던 스무 살의 나도 마찬가지다. 스무살, 우연히 대학교 영화 교향 수업에서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을 보고 타올랐던 새내기는 혁명가의 꿈을 품었었고, 그러다가 회피해 낭만주의를 핑계로 방송 노동자가 되었다. 매순간이 도덕적으로 뼈아픈 후회를 반복하고 있지만, 마이클 무어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잊고 있던 그 이름이지만, 트럼프의 재림과 극우의 파도 속에서, 트럼프 1기를 총체적으로 영상화한 <화씨 11/9>를 다시보게 되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2018년작 <화씨 11/9>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단순한 정치적 해프닝이 아닌, 미국 사회 깊숙이 뿌리내린 구조적 문제의 필연적 결과였음을 폭로하는 역작이다. 이 영화를 마르크스주의적 시선으로 읽어낼 때, 우리는 트럼프 현상이 더 이상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정상화된 예외 상태'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된다. 지금, 트럼프 2기 가능성이 점쳐지고 극우 세력이 요동치는 이 시점에서, 무어의 고발은 더욱 강력한 경고로 다가온다.
1. 트럼프의 등장은 예외가 아니라, 체제가 소환한 '정상'이었다.
영화는 트럼프의 당선이 개인의 기이한 돌출 행동이 아니라, 그를 가능하게 한 체제적 배경에 초점을 맞춘다. 무어는 과거 히틀러의 대중 선동 방식을 트럼프와 교차 편집하며,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대중 조작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지. 이는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 상태의 정상화'와 궤를 같이한다. 비상사태가 상시화되고, 폭력적 지배가 법의 형태를 띠게 되는 이 과정에서 트럼프는 체제가 빚어낸 괴물인 동시에, 그 체제의 병든 심장을 반영하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낳은 극심한 불평등,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대중의 분노와 좌절을 키웠고, 트럼프는 이 감정들을 기회 삼아 파시스트적 포퓰리즘으로 무대 위에 등장했다. 영화는 미시간주 플린트 수돗물 사태를 통해 자본의 논리와 정치적 무능이 어떻게 평범한 시민들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며, 트럼프의 출현이 '외부로부터의 침략'이 아니라 체제 내부에서 배양된 독이 든 성배임을 증명한다.
2. 무기력했던 민주당, 배신당한 개혁의 열망.
<화씨 11/9>는 트럼프의 등장 못지않게, 괴물을 탄생시킨 미국 민주당의 무기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변화'와 '희망'이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근본적인 자본주의적 문제 해결에는 실패했다. 흑인 및 유색 인종의 지지를 받았으면서도, 금융 위기 이후 월가를 개혁하지 못했고, 오히려 이들에게 막대한 후원금을 받았다. 건강보험 개혁 역시 한계를 드러내며 개혁 지지 대중의 기대를 저버린 셈이다. 영화는 민주당이 워싱턴 기득권과 손잡고 중산층과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려낸다.
더욱 통탄할 노릇은 민주당 내 '좌파'마저 무기력했다는 점이다. 버니 샌더스로 대표되는 진보 세력이 당원들의 뜨거운 지지 속에서 선전했지만, 영화가 암시하듯 힐러리 클린턴과의 경선 과정에서 당내 기득권의 비민주적인 공작에 희생당했다. 샌더스의 타협은 대중의 혁명적 열망을 제도권 안에서 희석시키며, 결국 기성 정치의 틀을 깨지 못했다. 이러한 민주당의 실패는 트럼프에게 대중의 분노를 흡수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제공했고,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계급 모순을 은폐하고 체제를 보존하는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개혁주의는 물론 사민주의적 민중주의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3. 낙관보다는 행동: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이 시급하다.
무어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 'GET MAD!'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절망에 빠진 대중에게 행동을 촉구한다. 교사들의 파업, 학생들의 총기 규제 시위 등 아래로부터의 저항 운동을 조명하며, 대중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는 단순히 '낙관적'이어서는 안 된다. 트럼프의 재집권과 극우의 전 세계적인 부상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후이며, 이 위기는 '더욱 파괴적인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이는 자본의 위기를 새로운 형태의 지배와 억압으로 돌파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맹목적인 희망보다는 신속하고 조직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단순히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것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사회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 영화가 보여준 시민들의 저항 정신은 고무적이지만, 그 저항이 개별적인 이슈를 넘어 체제 변혁을 향한 연대적 행동으로 발전해야 할 긴급한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마지막 시퀀스에서 "우리가 각성하려면 도널드 트럼프라는 극약처방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릅니다."라는 낙관론으로 끝나는 듯 하지만, 총기사건을 보여주며 하루 빨리 비상 브레이크를 당겨야 함을 보여준다.
<화씨 11/9>는 트럼프 시대의 비극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고질병에서 비롯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심지어 모든 컷들이 유기적이며, 얘예술적이다. 트펌프를 비판하는 여러 다큐멘터리나 시사 프로그램은 있겠지만, 마이클 무어의 유머감각과 박자감, 색채 이미지 사용 등 총체적인 예술적 연출력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다.(한국으로 치면 비슷한 인물은 김어준. 거기다가 최승호PD의 저널리즘에 버금가는 눈을 갖췄다. 김어준은 민주당에 기생하나, 마이클 무어는 민주당을 과감히 공격한다. 그럼 점에서 김어준과 민주당계 유튜버들의 압도적 상위화한아닐까?
이 영화가 현재에도 유효한 경고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 '정상화된 예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대중이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 되어, 새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할 때다. 그런 상황에서, 혁명가로서의 회피형 성격과 인내심이 부족한 나는 마이클 무어를 꿈꾼다. 정치적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이고, 영상적으로는 왕가위, 오우삼, 기타노 타케시 등을 좋아하지만, 이 양극의 화해물은 마이클 무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