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트 클럽>: 좌파적 남성성의 혁명
남성성, 악의 근원이 아닌 혁명의 불씨
오늘날 특정 진영에서는 남성성을 마치 모든 사회악의 원천인 양 규정하는 경향이 만연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푸틴의 '독성 남성성' 때문이라거나, 과거 윤석열의 비상계엄 시도를 '폭주하는 남성성' 문제로 치부하는 주장들은 복잡다단한 정치적 현실을 터무니없이 단순화한다. 이들은 공격성을 남성성과 등치시키며, 마치 수학 공식처럼 '남성성 → 폭력 → 전쟁 → 악의 축'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제시한다. 이는 지적 게으름을 넘어 명백한 지적 폭력이다. 이 같은 피상적인 일반화는 남성성에 내재된 '혁명적 에너지'의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며, 진정한 좌파적 비판의 본질인 부조리한 시스템에 저항하는 전투적 정신을 간과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한다.
거세된 남성들의 반란: <파이트 클럽>의 포효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걸작 <파이트 클럽>은 바로 이 '혁명적 남성성'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영화는 자본주의의 소비문화가 남성성을 어떻게 거세하고 무력화하는지를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주인공 잭(에드워드 노튼)은 현대 소비 지상주의의 완벽한 희생양이다. 이케아 카탈로그에 집착하고 명품 브랜드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그는 심각한 불면증과 실존적 공허감에 시달리는 무기력한 존재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남성성이 어떻게 억압되고 변질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잭에게 데미안적 환영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은 해방의 메시아로 등장한다. 타일러는 선언한다.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 이들이 결성한 '파이트 클럽'은 단순히 폭력을 소비하거나 오락으로 전락시키는 UFC와는 궤를 달리한다. 이곳은 사회적 지위, 직업, 소유물이라는 허울을 모두 벗어던지고 순수한 육체적 대결을 통해 내재된 분노를 일깨우며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원초적인 제의 공간, 즉 물질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현실의 유토피아다. 주먹질을 통해 경험하는 고통과 그 이후 찾아오는 쾌락, 그리고 대담함은 억눌렸던 본능의 분출이며, 현대 사회 속에서 상실했던 '남성성'을 재발견하는 과정으로 기능한다. 타일러의 "자기 파괴만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철학은 단순한 폭력 예찬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거짓 자아를 파괴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으라는 급진적인 선언인 것이다.
주먹으로 쓰는 혁명 선언문: 아나키즘의 전투적 실천
<파이트 클럽>의 진정한 혁명성은 개인적 해방을 넘어 집단적 저항으로 나아가는 서사에서 빛을 발한다. '프로젝트 메이헴'으로 진화한 파이트 클럽은 '유해한 남성성 회복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후기 자본주의의 붕괴를 꿈꾸는 아나키스트 집단의 투쟁으로 승화된다. 타일러와 그의 '우주 원숭이들'은 성형외과에서 훔친 인간 지방으로 비누를 만들고(자본주의적 소비에 대한 아이러니한 패러디), 기업 로고를 훼손하며, 궁극적으로는 금융 자본주의의 상징인 신용카드 회사 빌딩을 폭파한다. 이들의 폭력은 무차별적인 테러리즘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개인의 삶과 정체성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조직적이고 의식적인 반항이다. 이 영화가 개봉한 이후, 벌어진 시애틀 전투와 1994년 사파티스타의 부상을 보면서, 이 영화가 단지 판타지가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에 대한 현실적 분노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타일러는 일갈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의미 없는 존재들로 자라왔다. 우리에겐 위대한 전쟁도, 대공황도 없었다. 우리의 위대한 전쟁은 영적 전쟁이고, 우리의 대공황은 우리의 삶이다." 이는 시스템에 의해 억압된 현대인의 실존적 위기를 대변하며, 그 위기에 맞선 급진적 투쟁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파괴와 폭력성이 위험하게 비칠 수 있고, 혁명보다는 급진 테러리즘에 가까워 보일지라도, 이들의 분노는 가히 혁명적이다.
혁명적 남성성의 재발견: 정의로운 폭력의 서사
<파이트 클럽>은 남성성을 무조건적으로 유해하다고 낙인찍는 현대 진보 진영의 담론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 영화는 남성성, 특히 마초적 에너지가 지닌 혁명적 잠재력을 드러낸다. 체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진 우리에게, 이 영화는 진정한 자유를 위해 무엇을 파괴하고 무엇을 재건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좌파적 전투 정신과 궤를 같이하는 이 '혁명적 남성성'은 단순한 폭력 예찬이 아니라, 억압적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저항의 표현이다. "너는 네가 일하는 직업이 아니다. 네 은행 계좌에 있는 돈도 아니다. 네가 타는 차도, 네 지갑 속의 카드도 아니다. 너는 세상을 노래하는 춤추는 똥이다." 이 명대사는 자본주의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아를 찾으라는 급진적인 외침이자, 진정한 좌파적 선언에 다름 아니다. <파이트 클럽>은 남성성의 긍정적 측면, 즉 불의한 체제에 맞서는 '정의로운 폭력'의 가능성을 예찬하는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다.
P.S
다만, 말 그대로 영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브레드 피트의 육체미와 그야말로 해로운 남성성에만 집중하는 자칭 상남자들이 있는 듯 하다. 그래서 감독도 딸의 친구중에 파이트 클럽을 정말 좋아한든 남자애가 있다고 하자, 그와 말도 섞지 말라는 말이 단지 농담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급진적인 영화가 단지 테토남 호소인들에게 오락 영화로 소비되는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