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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극우의 악의 연대기

모스탄 방한과 찰리 커크 죽음을 중점으로

by 꿈꾸는 곰돌이

한미 극우의 악의 연대기

: 모스탄 방한과 찰리 커크 죽음을 중점으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마르크스의 선언은 19세기 유럽의 거리에서 울려 퍼지며 압제받던 이들에게 희망을 선사하였으나, 21세기 한국과 미국의 현실에서 이 구호는 사뭇 쓸쓸한 메아리로 들려온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 눈앞에는 좌파와 노동자들의 희미하고 분절된 연대보다 훨씬 더 완고하고 강건하게 단결하는 존재들이 있으니, 바로 한국과 미국의 극우 세력이다. 극우의 연대기는 나쁜 의미로 경이롭다. 마르크스 정치학의 관점에서, 자본가는 노동 계급 탄압에는 힘을 합쳐 연대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 노동 계급에 맞서 ‘이윤’이라는 파이를 지키더라도, 그 파이를 두고 서로의 몫을 경쟁하는 것이 자본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이익을 맹목적으로, 반동적으로 지지하는 극우의 연대는 여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미 극우의 연대는 그 불가능한 것을 이뤄냈다. 한국 극우의 고유한 특성 덕분이다.


이러한 한국 극우의 맹목적인 기질은 특히 한국 극우에서 '종미(從美)'에 가까운 '친미' 성향으로 발현된다. 태생부터가 냉전의 반영이자, 남북 대립의 결과로 형성되었기에, 한국 극우에게 미국은 단순한 동맹국을 넘어선 일종의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인식된다. 미국 트럼프 정부의 관세 협박이 한국의 노동 계급은 물론, 자본주의 지배자들에게도 결코 호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트럼프를 '윤어게인'의 메시아로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일부 민족주의 진보 세력들이 한국 극우를 가짜 보수, 매국노 등으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는 한국 극우의 특수성이 반영된 행동이자, ‘국익’이라는 우파의 제1가 치마저 미국에 종속시키는 비합리적인 행태인 것이다.


이러한 특수성 위에서 한미 극우 연대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친미'라는 가면 뒤에 자유도, 민주도 없는 반민주주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자유 수호'와 '한미 동맹 강화'라는 그럴듯한 명분이 자리하지만, 그 이면에는 사회적 소수자 혐오와 권위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도사린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마가(MAGA)' 운동이 보여주듯이, 이들은 노골적인 반이민 정책, 인종차별, 여성 및 성소수자 혐오를 공공연히 드러내며 사회적 소수자를 공격한다.

미국 공화당 회의에 여러 차례 참석하여 강연하며 트럼프의 위대성과 한미 동맹을 강조했던 찰리 커크 같은 인물들이 이러한 네트워크의 핵심 인사였다. 특히 재미교포인 모스 탄 전 대사의 행보는 한미 극우 연대의 공고함을 보여준다. 그는 부정선거 주장 및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비방과 같은 극우 음모론을 설파하며, 한국 극우에게 트럼프가 보낸 사자와 같은 존재로 부각되었다. 모스 탄의 방한은 입국장에서 극우 세력의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한국 극우의 기세등등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비록 서울대 강연 및 은평제일교회 앞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항의와 일부 여당 의원들의 비판, 특검의 조치로 대통령과의 접견은 불발되었으나, 그의 방한 자체가 한미 극우 연대의 강력한 현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트럼프 역시 모스 탄의 활동에 대해 명확히 규제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한국 극우와의 연대를 통해 이재명 정부와의 무역 협상을 비롯한 외교 관계에서 압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결국 한미 극우의 연대는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미국의 극우 이데올로기를 한국 사회로 수출하고, 다시 한국의 극우가 이를 흡수하고 재생산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빌드업 코리아 2025' 같은 행사에서 미국의 극우 인사들이 한국의 극우 기독교 세력과 결합하여 '반공(반중·반북·반좌파)' 선동을 펼치는 모습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찰리 커크가 죽기 5일 전에 방문한 이 행사에서 이들은 '한미 동맹'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유포하고, 정적들을 '친북·친중 세력'으로 매도하며 민주적 절차와 결과에 불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결국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 뒤에 숨어, 스스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자가당착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찰리커크의 자가당착적 죽음과 추모 연대

이 극우 연대가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젊은 세대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찰리 커크는 '터닝포인트 USA'를 통해 대학가에서 대놓고 인종차별적이고 극단적인 망언을 쏟아냈으며, 청년 극우 논객에 불과한 그를 트럼프는 입이 닳도록 칭찬하였다. 이러한 인물이 한국에 와서 정부의 '교회 탄압'을 운운하는 것을 전혀 제지하지 않은 것은, 미국 극우 세력이 한국 극우를 자신들의 국익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음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찰리 커크가 총에 맞아 사망하자 트럼프와 극우 인사들이 그를 '순교자'로 추앙하며 "좌파를 박살내야 한다"라고 외친 모습을 보라. 일개 망언이나 배설하는 극우 논객을 두고, 한국과 미국의 극우들은 그를 영웅화하며, 그를 통해 결속을 다진다. 한국에서도 극우 정치인들이 그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내놓았고 거리에서도 추모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역겹기 짝이 없는 위선적 행태이다.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종청소에는 이스라엘의 정당방위를 운운하던 자들이, 일개 극우 논객의 자가당착적인 죽음(총기 옹호론자였던 그가 총격으로 사망)을 두고는 '순교' 운운하며 추모를 한 것이다. 찰리 커크의 죽음으로, 한미 극우의 반좌파-반민주 연대는 견고해졌다.


결론적으로, 한미 극우의 역겨운 연대는 단순히 '반중'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반민주적인 반동 세력의 연대기이다. 그들의 주장은 국제적인 협력과 포용, 다양성의 가치를 부정하며 사회를 퇴행시키는 문화적 병리 현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이들이 이토록 완고하고 강건하게 단결하는 동안, 정작 단결해야 할 한국과 미국의 노동자들과 진보 세력의 연대는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외쳤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가 오늘날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극우의 반동적 연대 전선에 맞서, 한미 노동 계급과 좌파의 연대 전선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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