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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의 매력 ​

by 꿈꾸는 곰돌이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의 매력

무라카미 하루키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한다. 에세이스트로서의 하루키는 정말이지 매력적이다. 뭐랄까, 그를 '단문의 대가'라고 부르고 싶달까? 남진우 평론가의 말처럼, 번역의 장벽마저 뛰어넘어 전해지는 그의 솔직하고 간결한 문장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루키만의 타고난 무기다.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는 조금 다르다. 그의 장편소설 세계는 늘 몽환적이고 기묘한 미로 속으로 이끈다. 때로는 그의 장편 속 인물들이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로망'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루카치가 말했던 '아이러니를 통해 내면의 총체성을 추구하는 서사시의 계승자'로서의 장편소설이, 상실된 총체성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의 여정이라면, 하루키의 장편은 어쩐지 '분량만 긴 단편'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거대한 서사 속에 유기적인 사건들이 엮이기보다는, 각각 독특한 분위기와 의미를 가진 에피소드들이 그저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랄까. 문장 또한 에세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서사시의 후계자'인 장편소설이 보여줘야 할 깊이 있는 울림과는 결이 다르게 다가온다.

그랬던 나에게도 하루키의 '단편'은 항상 매력적이었다. 사실 그의 장편이 단편처럼 쓰였다는 점에서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면, 역설적으로 그의 단편은 하루키 특유의 문장력과 섬세한 인물 묘사가 더욱 빛을 발한다. 연휴를 맞아 그의 단편을 읽어보았다.

『일인칭 단수』는 어쩌면 이처럼 호불호가 갈렸던 평가마저 하루키만의 독보적인 매력으로 탈바꿈시키는 마법 같은 작품이다. 특히 '나'라는 주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섬세하게 파고드는 두 단편, 「돌베개에」와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를 읽고 나면, 소설가 하루키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돌베개에」는 시간의 흐름 속에 희미해지는 기억의 조각들이 어떻게 한 인간의 내면을 영원히 지배하는지 보여준다. 물론, 그 둘을 이어주는 다리가 하루키답게 '섹스와 예술'이라는 점은 변함없지만 말이다. 대학 2학년,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쳐 지나간 한 여성과의 하룻밤. 그 순간의 생생한 기억보다는, 그녀가 보내온 자작 시집의 파편이 '나'의 가슴에 깊이 박혀 삶의 여정을 함께한다. 얼굴도 이름도 가물가물한 그녀지만, 그녀가 쓴 시구절만은 선명하게 남아 '나'를 따라다닌다. 이름 모를 관계 속에서 피어난 하룻밤의 접촉이 어떻게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고, 그 작은 순간이 얼마나 영원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여기서 '나'는 거창한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그저 삶의 파편들을 경험하고 그 흔적들을 추적자하는 관찰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 '나'를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들이 어떻게 존재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는 상상이 현실을 침범하는 하루키 특유의 환상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역시 자전적인 소설로, 재즈에 푹 빠져 살았던 대학생 시절, '나'는 "찰리 파커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어떤 음악을 남겼을까"하며 상상하며 가상의 보사노바 앨범 평론을 썼다. 그런데 수십 년이 흐른 후,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그 가상의 앨범이 현실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이건 단순한 회상이나 망상이 아니다. 글쓰기와 상상이 지닌 창조적인 힘,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하루키만의 세계관을 밀도 높게 담아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여기에서 '나'는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해낸 주체로 기능한다. 현실에 새로운 이야기를 불어넣듯이, 이 '나' 역시 허구를 현실로 불러내는 매개체가 되는 화자다.

이 두 단편을 통해 우리는 소설가 하루키의 진가를 제대로 발견하게 된다. 그가 장편에서 보여주던 '문제적 개인'의 '미시성'은 거대한 서사를 통해 사회적 의미를 탐구하는 루카치적인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개인의 내면과 존재론적인 질문들을 파고든다. 『일인칭 단수』에서는 이러한 하루키적 특성들이 단편이라는 짧은 형식 속에서 훨씬 더 농축되고 밀도 있게 빛을 발하고 있어. 스쳐 가는 만남의 잔상과 상상이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들을 통해 '나'는 삶의 비선형적인 시간, 예측할 수 없는 우연,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끊임없이 깨닫게 된다. 이게 바로 내가 하루키의 장편소설에선 쉽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으면서도, 『일인칭 단수』를 호평하는 이유이다. 단편이야말로 하루키의 문학적 특징, 즉 일상 속에 스며든 비일상, 존재의 불확실성, 그리고 기억과 상상력의 교차점을 가장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멋진 무대가 되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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