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방식론
성년이 된 이후, 투쟁의 현장과 고전 탐구의 연속 속에서 세상을 마주하였다. 합리론과 경험론에 모두 부합하는(!) 세상 공부였을까? 그 모든 치열한 과정 속에서 사유는 점차 선명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니, 이는 혁명적 활동가로서, 또 현실을 기록하고 비판하는 방송 노동자로서 나를 지탱하는 굳건한 사유 전통이다. 이 전통은 세 가지 근간 위에 서 있으며, 각각은 독립된 기둥이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며 하나의 총체적인 지평을 열어주는 빛줄기와 같다. 고전 마르크스주의과 이에 준하는 서구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연 세피라의 성좌 같은 것이리고 할까.
첫 번째는 총체적 사유이다. 쉽게 말해, 부분을 반드시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 이것은 사회과학의 근본 테제라 할 수 있는 '현상과 본질의 구분'을 위한 필연적 시각이다. 그렇기에 단편적인 현상에 시선을 가두지 않는다. 루카치와 헤겔이 말했듯, 세계는 고립된 파편들의 집합이 아니라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거대한 전체이다. 진리는 참으로 전체적인 것이다. 고요한 호수 위에 돌 하나를 던지면 작은 파문이 일지만, 그 파문은 이내 호수 전체로 번져나간다. 그러하듯, 사회의 어떤 미세한 균열도 결국은 거대한 구조의 균형을 흔드는 파열음이다.언제나 개별적인 고통과 분노를 전체 사회 시스템의 맥락 속에서 읽어내며, 눈에 보이는 지표 너머의 심층적인 구조를 탐색하여 진실에 다가선다.
두 번째는 변증법적 사유이다. 세상은 고정불변의 질서 속에 안주하지 않는다. 특히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의 전통인 혁명적 사유뿐만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인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의 사유라고도 할 수 있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한 면만을 붙들고 영원하다고 외치는 것은 거짓된 안정에 불과하다. 따라서 형식 논리에 대한 인정과 한계 극복을 목표로 한다. 형식 논리가 A는 A라고 선언하며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킬 때, 변증법은 A가 아닌 A와의 갈등 속에서 새로운 A'로 변모하는 과정을 응시한다. 모든 생성 속에는 소멸의 씨앗이 있고, 모든 통합 속에는 해체의 가능성이 숨어 있는 법이다. 현실의 역동적인 운동성을 포착하고, 모순 속에서 새로운 의미와 방향성을 발견하며, 끊임없이 생성되는 대립항들을 통해 진보의 방향을 가늠하는 필수적 사유방식이다.
세 번째는 유물론적 사유이다. 현상 너머에 초월적인 신념이나 신비로운 힘이 작용한다고 믿지 않는다. 오직 물질적인 토대 위에서 인간의 삶과 사회가 구성되고 발전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유물론은 기계적 유물론이 아닌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전체의 관점에서 영롱한 환상이 아닌, 차가운 현실의 재료와 조건들로부터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사회의 모든 역사적 사건과 구조는 생산력과 생산 관계, 그리고 이를 둘러싼 경제적 토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인류 사회에 적용한 역사 유물론적 사유도 이에 해당한다. 이를 포괄하는 유물론적 사유는 과학적 사유의 근간을 이룬다.
이 세 가지 사유 방식은 내가 구축하고 획득한 지성적 삶의 큰 축이자, 세상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진보를 향해 나아가려는 내 청춘의 편린이 가득한 모든 노력의 총화이다. 총체적인 눈으로 관계망을 보고, 변증법적인 안목으로 변화를 읽으며, 유물론적인 토대 위에서 현실의 뿌리를 탐색하는 것. 이것은 인식론인 동시에, 실천론이다.